71년 전 격전지 '사창리 전투' 현장서 나온 일병 계급장..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단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이종현 기자 입력 2022. 6. 25. 06:00 수정 2022. 6. 2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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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격전지 '사창리 전투' 현장서 유해 2구 발굴
약식제례 거쳐 유해보관소 안치.. DNA 확인절차 남아
발굴 유해 중 가족 품으로 돌아간 건 1.6%.. 유가족 찾기에도 힘써야

지난 23일 오전 8시 강원 철원군 서면과 화천군 사내면 사이에 위치한 광덕산 상해봉. 장맛비가 흩날리는 가운데 젊은 장병 수십명이 태극기로 감싼 관을 앞에 놓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인근에 위치한 육군 3사단 불사조대대 장병들이었다. 묵념을 마친 장병들은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라고 외친 뒤 발굴 현장으로 이동했다.

장맛비가 내리는 와중에 진행된 유해발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쉽지 않았다. 부대에서 비포장 산길을 1시간은 이동해야 유해발굴 현장이 나오는데다 유해와 유품이 70도나 되는 경사진 언덕에서 발굴되는 탓에 장병들은 삽과 나무줄기에 의지한 채 발굴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장병들은 조국을 지키다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선배 전우들을 찾는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발굴을 이어갔다.

박재욱(21) 일병은 “2시간씩 산을 오르내리는 게 힘들지만 막상 현장에서 유품을 발굴하고 유해가 나온다는 사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며 “전쟁에 온몸을 바쳐 헌신하신 선배 전우님들에 대한 감사함이 더 와 닿았다”고 말했다.

23일 강원 철원군 서면과 화천군 사내면 사이에 위치한 광덕산 상해봉 현장에서 장병들이 유해 발굴에 나서고 있다. 유해 발굴 과정에서 나온 유품들도 함께 진열돼 있다./민영빈 기자, 육군 22여단 사진 제공

간절했던 이들의 마음이 통한 덕분인지 이곳에선 지난 15일과 16일에 유해 2구가 발굴됐다. 왼쪽 윗 팔뼈와 오른쪽 골반뼈였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국유단) 소속 병사들과 유해 발굴 지원에 나선 육군 5군단 유해발굴팀과 3사단 불사조대대 소속 병사들은 발견된 유해 2구를 관에 정성스레 담았다. 유해가 담긴 관은 다시 태극기로 한 번 더 감싸졌다. 선배 전우들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철원군 재향군인회에서도 한걸음에 현장을 찾았다. 3사단의 발굴지역에서 3년 만에 찾은 유해였다.

23일 오전 9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약식제례도 진행됐다. 진혼곡과 함께 봉송병이 각 관을 들고 봉송차량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봉송길은 관을 들고 걸어가는 봉송병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장병들이 모두 거수경례를 하면서 71년 전 격전지에서 전사한 선배 전우에 대한 예우를 갖췄다.

이번에 유해 2구가 발굴된 현장은 ‘사창리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사창리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국군 6사단이 중공군 4개 사단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전투였다. 이 과정에서 200여명이 전사했고 1000여명이 실종됐다. 이번에 발견된 유해 2구 외에도 당시 국군들이 쓴 철모나 수통, 탄약, 탄창, 칫솔과 숟가락 등 유품 242점도 함께 발굴됐다. 국유단은 이와 같은 현장 발굴을 위해 현재 8개 발굴팀으로 구성해 전국에서 활약 중이다. 각 현장과 가까운 부대와 합동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23일 강원 철원군 서면과 화천군 사내면 사이에 위치한 광덕산 상해봉에서 발굴된 유해 2구의 넋을 기리는 약식제례를 진행하고 있다./민영빈 기자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은 유해 발굴 현장에서도 드러났다. 불사조대대 1중대장을 맡은 권남기(26) 대위는 “유품들을 하나씩 발견할 때마다 당시 전투 현장을 어렴풋이 느꼈다. 결정적인 유품인 계급장을 발굴했지만 그 주인인 유해를 발굴하지 못해 안타까웠다”면서 “선배 전우님들을 한 분이라도 더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더 강렬해졌다”고 말했다.

이번 발굴에서 국군 계급장(일병)도 함께 발굴됐지만 계급장의 주인은 아직 찾지 못했다. 유해 2구의 신원도 확인되지 않았다. 박정효 국유단 발굴팀장은 “유해가 발굴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인식표나 이름이 새겨진 만년필 등 신원 확인이 될 만한 유품이 같이 발견되지 않아 안타깝다”며 “유해들은 유해보관소에 안치한 후에 DNA 시료를 채취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0년 3년간 한시적으로 진행됐던 유해발굴 사업은 2007년 국방부 산하 상설 조직이 설립되면서 본격화됐다. 처음 유해발굴에 나선 지 약 23년이 지난 현재까지 발견된 유해 건수는 1만2000여건에 달한다. 하지만 이 중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유해는 단 192구밖에 되지 않는다. 국유단은 6·25 전쟁 전사자 명단을 바탕으로 유족을 역추적하는 탐문 활동을 하거나 재향군인회와 함께 유족을 찾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오재복 철원군 재향군인회 회장은 “유해발굴만큼이나 이들을 가족 품으로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며 “DNA 시료 채취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8촌 이내에서 하는데 이제는 다들 나이도 많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아서 단 한 분이라도 더 가족의 품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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