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시2' 보며 모두 웃을 때..나만 웃지 못했다[남기자의 체헐리즘]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직접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합친 말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맘으로 현장 곳곳을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을 알리고, 그늘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영화 <범죄도시 2>를 보고 있었다. 극중 형사인 마석도(마동석 분)가 장이수(박지환 분)를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 장이수는 1편에서도 재밌는 인물이었기에 웃긴 얘기가 오가겠구나 싶었다. 역시나 마석도가 장이수에게 뭐라고 하자, 근처 관객들이 몸을 들썩이며 웃는 게 보였다. 앞 커플은 서로 어깨를 때리며 난리가 났다.
난 웃을 수 없었다. 웃지 않는 건 극장에서 나뿐인 것 같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마석도가 뭐라고 했는지 몰라서였다.
모든 대사와 배경 음악과 효과음이 웅얼웅얼하는 정도로만 들렸다.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아 음악을 틀고, 소음을 차단하는 귀 덮개로 귀를 막아서였다. 다른 관객에 방해되지 않도록, 바깥으로 이어폰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는 걸 몇 번씩 확인했다.
그리 체험하고 있었다. 청각 장애인이 한국 영화를 보면 어떤 기분일지를.
2019년 5월, 영화 <기생충>이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아 전 국민이 기뻐할 때였다. 이를 본 관객이 무려 1000만 명이 넘었다.
그 당시 소희 씨도 <기생충>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볼 수 없었다. <기생충>이 한국 영화여서였다. 한국 영화는 한글 자막이 없다. 청각장애인인 그는 화면만 봐야 했다. 못 보니 화제에서 소외됐다. "주변에선 이미 기생충 영화 후기가 들려오는데, 그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도, 공감할 것도 너무 적었어요."
청각장애인도 볼 수 있는 '가치봄'이란 이름의 한글 자막 영화가 있긴 했다. 그러나 상영 날짜, 횟수, 영화관 모두 너무 적었다. 6월 한 달만, 그것도 24일에서 28일까지만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영화관은 구로, 강변, 노원, 피카디리 CGV뿐이었다. 상영 횟수도 전국 통틀어 고작 40여 회였다. 심지어 요일도 주말은 하나도 없고 다 평일이었다. 평일도 오후 2시 아니면 저녁 7시였다.
소희 씨가 "직장인이라 평일 오후에 시간을 못 내고, 퇴근 후 가야 하는데 구로, 강변은 직장서 1시간도 넘는 거리라 첫 부분을 놓칠 수밖에 없는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그때 <기생충>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못했다.
우선은 영화에서 나오는 소리를 어떻게 차단할지가 고민이었다. 고성능 귀마개(차음 32데시벨)를 하고, 그 위에 고성능 귀덮개(차음 29데시벨)를 하기로 했다. 영화관에 도착해 그리 해봤지만, 소리가 커서 뚫고 들어왔다. 별수 없이, 이어폰을 꽂아 음악을 틀고, 거기에 귀 덮개를 하는 걸로 바꿨다. 그러니 대사도, 배경 음악도 웅얼웅얼하며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영화를 즐겨야 할 시간에 나홀로 추리하려니 신경이 곤두섰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 다 이해되기 전에 장면이 계속 바뀌었다. 강해상(손석구 분)이 다른 무리를 왜 죽이는지, 강해상을 죽이려고 온 사람들은 또 누군지, 마석도는 강해상을 날리며 뭐라고 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알아들은 건 마석도의 "야, 이리와 봐"와 베트남 경찰의 대사(유일한 한글 자막)뿐이었다. 그날따라 영화관이 유독 더 컴컴하게 느껴졌다.
주먹질과 칼질만 난무하는 장면이, 전체 영화 중에서 가장 차별적이지 않았다. 나란히 앉은 관객들과 아주 똑같이 이해한 건, 대사 없는 액션 장면뿐이었다. 배우들 입 모양이라도 보고 추측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똑바로 보여주는 장면이 별로 없었다. 뒤돌아 말하고, 말하지 않는 사람을 보여주고, 빠르게 말하고 넘어갔다.
"범죄도시 2는 액션과 유머가 반반"이란 추천 리뷰를 보고 갔건만, 절반인 '유머'를 알 길이 없으니 너무 무겁고 진지한 액션 영화가 됐다. 관객들이 너무 재밌다며 추천을 많이 한 명대사도 언제 지나갔는지 몰랐다. 큰 화면을 보는 집중력이 점점 떨어지니, 괜스레 주위 사람들을 보게 됐다. 앞에 앉은 노부부도, 대각선 방향의 중년 여성도, 오른쪽의 커플도 웃는데, 홀로 즐겁지 않았다.
106분 동안 웃은 건 딱 한 번이었다. 마석도가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서 강해상 일당 중 한 명과 싸우는데, 악당이 맞기 싫어 뒷걸음질 치는 장면이었다.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 이해가 가는 유머는 그뿐이었다. 한 번 웃은 뒤엔 다시 입 주변이 시멘트처럼 굳었다. 나중엔 '에라 모르겠다'란 심정으로 힘을 쭉 풀고 화면을 바라보니, 묵직한 졸음에 고개가 좌우로 꺾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브런치 작가이자 청각장애인인 '밍이(필명)'님도, 한글 자막 없는 <범죄도시 2>를 본 후기가 비슷했다. 그는 지난달 31일 올린 <범죄도시를 보며 웃을 수 없었다>란 제목의 글에서 "초반이 지나며 사람들 웃음이 터졌고, 남편도 옆에서 계속 웃었다"며 "처음엔 나도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몰입을 깨고 싶지 않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점점 그에겐 폭력적인 액션 영화가 되어가고 있었다고. 재미나게 봐서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갸우뚱한 부분이 꽤 있었단다.
106분이 더디게 가고, 영화가 끝난 뒤에야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마석도의 주먹은 통쾌했건만, 밖으로 나가는 길은 어딘지 모르게 씁쓸했다. 반면에 함께 영화관에 있던 이들은 영화 이야기로 웃음이 가득했다.
같은 한국 영화를 보는 시간이, 왜 누구에게만 즐겁지 않게 된 걸까. 그리고 그걸 왜 여태껏 바꾸지 않았을까. 여운이나 웃음 대신, 내겐 이런저런 물음만이 가득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찾아봤더니, 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23일 오후 2시에 강변 CGV에서 상영하기에 홈페이지에서 예매해 가봤다. 평일 낮임에도 영화관에 관객들이 꽉 차 있었다. 그만큼 시청각 장애인들이 한국 영화를 온전히 볼 기회가 없는 거구나 싶었다.
영화관에 도착해 귀 덮개와 이어폰으로 똑같이 소릴 차단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석도가, 강해상이 말하는 것마다 한글 자막이 빠짐없이 나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위기 상황에선 '긴장감 있고 어두운 음악'이라고 어떤 배경 음악인지도 알려주고, 싸울 땐 '유리 깨지는 소리'처럼 효과음까지 자막으로 보여줬다.
배우들 대사와 대사 사이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도 상세하게 나왔다. '승용차가 도착하고 뒷좌석에서 종두와 기백이 내린다', '강해상이 빤히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린다', 같은 식으로 장면을 말로 그려주는 거다. 눈을 감고 들어봤더니, 영화장면이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었다.
'범죄도시 2가 이리 유쾌하고 재밌는 영화였구나', 하루 만에야 다시 깨달았다. 다른 관객들과 함께 긴장하고, 함께 웃을 수 있어 좋았다. 그게 좋다는 걸 처음 안 것도 좋았다.
청각장애인인 소희 씨는 "(한글 자막이 있으면) 내용을 바로바로 이해할 수 있어서, 온전히 관객으로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느낌을 많이 얻는다"며 "모두가 어떤 장면에서 울고 웃고 저도 똑같이 즐길 수 있다는 게 가장 크다"고 했다.
박승규 사단법인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는 "(영화관 사업자들이) 장애인들에게 시혜적이고 동정적이고 이벤트성으로 '가치봄' 상영회를 하면서,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한 달에 영화 1~2개를 정해 4~5일 정도, 그것도 평일 위주로 시청각 장애인들을 위한다며 한글 자막 영화를 보여주는 한계를 직설적으로 꼬집은 게다.
실제로, 2020년 기준 3대 영화관서 상영된 '가치봄' 영화는 8편에 불과했고, 상영 횟수도 116회에 그쳤다. 그해 국내 개봉 영화(약 1900편)의 0.4% 수준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어디서라도, 원하는 영화를, 바라는 시간대에 볼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그러니 근본적인 '차별'이라고. 박 활동가가 "영화 <도가니>의 피해 당사자인 청각 장애인들이, 정작 그 영화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 말에 그 모든 차별적 상황이 다 담겨 있었다.
영화관 사업자들 스스로 의지가 없으니, 시청각 장애인 4명이 나서서 멀티플렉스 3사(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에 소송을 걸었다. 2016년 시작해 벌써 7년째 이어지고 있다. 1심(2017년 12월)은 장애인들이 승소, 2심(2021년 11월) 역시 장애인들이 일부 승소했다. 2심 재판부는 300석 이상 대형 멀티플렉스에 대해 "1개 이상의 상영관에서 총 상영 횟수의 3% 범위에서 한글 자막 또는 화면해설 영화를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원고와 피고 모두 상고해, 대법원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전체 응답자의 76%(1709명)가 한글 자막이 '좋다, 상관없다'고 답했다. 여기에 응답한 소정 님은 "(배우들 대사) 발음이 부정확한 경우도 있고, 영상 집중력이 떨어질 때 글자 자막이 있으면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우형 님도 "종종 배우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놓칠 때가 있어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며 "한글 자막이 있으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미 경험했단 이도 있었다. 수아 님은 "외국에서 한국 영화를 볼 때 한글 자막이 있었는데, 오히려 잘 이해되고 전혀 영화에 방해받지 않고 좋았다"고 했다. 대다수는 특히 "넷플릭스도 한글 자막을 켜고 본다"며 이미 익숙하단 반응이었다.
반면, 전체의 24%(529명)는 '싫다'고 응답했다. 한 응답자는 "계속해서 영화 아래에 자막이 나오면 대사에 대한 감정이, 집중이 깨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렇듯 거부감 있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이는 '폐쇄형 방식'으로 보완하면 된다. 모두가 함께 보는 영화관 화면에 한글 자막을 띄우고, 화면해설을 트는 게 '개방형 방식'이라면, '폐쇄형 방식'은 개인 기기를 통해 시청각 장애인 관객에게만 한글 자막과 화면해설을 제공하는 거다. 예컨대, 같은 상영관에서 청각 장애인은 스마트폰이나 스마트 안경으로 한글 자막을 각자 자리에서 보고, 비장애인은 한글 자막이 없는 화면을 볼 수 있는 거다. 시각 장애인은 이어폰으로 화면 해설을 듣는 거다.
3대 영화관에 대한 차별 구제 소송을 진행 중인, 김재왕 변호사(45,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는 "사실 장애인 입장에선 스크린에 자막이 바로 떠 있으면 보기도 편하고, 화면해설도 큰 소리로 나오니까 '개방형'이 훨씬 좋긴 하다"며 "그렇지만 그 방식으론 비장애인과 함께 보는 게 쉽지 않으니 폐쇄형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쨌든 개방형과 폐쇄형, 두 가지 방식이 혼용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미국(하은선 영진위 미국통신원 분석)은 2016년 11월 장애인법을 개정했다. 여기서 '디지털 영화를 상영하는 모든 영화관은 장애인 이용자에게 자막 및 화면해설을 제공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에 따른 모든 비용도 제작사나 배급사 부담이다.
예컨대, 영화 <탑 건 : 매버릭>을 기준(5월 28일자)으로, 미국 3대 극장(AMC, 리갈, 시네마크)이 자막, 화면해설을 상영한 횟수를 조사해봤다. AMC 극장은 총 상영횟수 27회 중 26회를, 리갈 극장은 31회 중 31회 전부를, 시네마크 극장도 32회 중 32회 전부를, 폐쇄형 자막과 화면해설을 제공했다. 청각 장애인은 자신의 좌석 앞 투명한 화면이나 안경으로 자막을 보고, 시각장애인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 화면해설을 들을 수 있는 게다.
영국과 아일랜드 영화관 약 550곳에서도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매주 1500회 정도 자막 영화 상영을 한다. 특히 상영 횟수는 최근 5년 사이 120% 늘었다. 대부분 자막은 개방형(영화관 화면에 띄우는 것)으로 이뤄진다. 다만, 인기 시간대엔 자막 상영이 적은 편이다.
국내에서도 시청각 장애인들에 3대 멀티플렉스에 제기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면, 이들에게 자막과 화면해설 상영 의무가 부여될 전망이다. 이들 영화관 운영사들이 비용 부담을 얘기하는 것에 대해, 김 변호사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는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방식을 적용해도, 영화관 한 곳당 380만 원 정도인데, 고객 400명이 가서 1만 원씩만 써도 회복되는 비용"이라고. 그러니 '핑계'라는 거다.
에필로그(epilogue).
기사가 너무 길어서 다 못 본 이들을 위한 한 가지 체험 제안. 준비물은 넷플릭스.
1. 한국 영화 하나를 틀고 음량을 0으로 만든다.
2. 그렇게 해놓고 영화를 절반 정도 본다.
3. 절반 정도 봤을 때 한글 자막을 켠다.
4.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물론, 청각 장애인이라고 모두가 아예 못 듣는 건 아니지만 한 번쯤 짐작해보자는 거다.
43만 5000명(지난해 기준 청각 장애인의 수, 복지부 통계)이 영화관에 오면 보내야 할 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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