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한 방울, 독약 [물에 관한 알쓸신잡]

이명철 2022. 6. 25. 11: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약이 특혜였던 이유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죄인은 사약을 받으라.”

죄인은 임금을 향해 큰절을 올리고 두 손으로 약사발을 들어 사약을 마십니다. 한 사발을 다 마시기도 전에 죄인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집니다. 사극에서 빠지면 왠지 섭섭한 단골 장면입니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죽음을 명한 약이기는 해도 임금이 내렸기 때문에 아무나 사약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만 가능했지요.

사약은 사람을 죽게 하는 약이니 사약의 ‘사’는 당연히 ‘죽을 사(死)’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틀렸습니다. 임금이 하사하는 약이라는 의미로 ‘줄 사(賜)’를 씁니다.

기억해 보면 사약을 받는 죄인은 대부분 명망 있는 선비거나 궁궐 내 왕의 친인척으로 대부분 지체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사약은 고위 관료나 왕실 친인척이 큰 죄를 지었을 때 임금이 내리는 특혜성 처형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약을 받은 사람은 왕의 처소를 향해 네 번 큰절을 올리고서 마시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사약은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한 사발도 마시기 전에 피를 토하면서 죽는 걸까요? 사약은 임금이 내리고 사람을 죽이는 약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조제할 수 없었습니다. 궁중의 의약을 만드는 내의원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서 제조하고 관리했기 때문에 아쉽게도 사약에 대한 ‘레시피’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관련 기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사약 성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다만 추정만 할 뿐이지요. 당시 독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비상, 부자, 천남성과 같은 재료를 섞어서 제조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약은 임금이 죄인을 죽이는 약이지만 정치적 반대 세력의 손에 들어가면 임금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에 사약 조제법을 극비에 부치는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조선시대 독살설이 떠도는 임금과 세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종, 단종, 연산군 등을 비롯해 10명이 훌쩍 넘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임금을 비롯한 왕족은 늘 독살을 두려워했고 음식에 독이 들어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수라상 음식을 사전에 맛보는 기미상궁을 뒀습니다.

정확한 ‘레시피’도 없고 의학 지식도 변변하지 않다 보니 약발이 좋은 ‘죽여주는’ 사약을 늘 만들 수는 없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사약을 받을 죄인이 먼 귀양지에 있는 경우 여러 날을 운반해 가는 동안 사약이 상해 약효가 떨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을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발이 좋지 않아 죄인이 사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사약을 조제한 내의원에서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 사약을 만들어 보낼 때는 추가로 ‘리필’이 가능하도록 여유 있게 챙겨 보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송시열, 조광조가 받은 사약도 약발이 시원찮은 사약이었는지 여러 사발을 마시고 나서야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은 임형수라는 사람은 무려 16잔의 사약을 마시고도 죽지 않아 결국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기록을 보면 사약을 마시는 도중 사약을 전하러 온 의금부 서리를 보고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라는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부리며 사약을 마셨다고 합니다.

사극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사약 사발을 마시다 말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은 모두 극적 효과를 위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독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독살이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다른 방법에 비해 은밀하게 죽일 수 있었고, 법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사망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타살이 의심되어도 독을 검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밝혀내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독살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이뤄졌던 것에 비해 조선시대 사약은 중앙정부에 의해 공공연하게 이뤄졌다는 점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사례입니다.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은 목을 베는 참수형이나 목을 매다는 교수형이 간단했을 텐데 왜 약발도 변변치 않은 약을 만들어서 보내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했을까요? 이유는 조선시대 통치이념의 근간이었던 유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당시 중죄를 지은 죄인에게 극형의 처벌법은 교수형이나 참수형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처벌법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은 머리카락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강했던 당시에 신체를 훼손한다는 것은 사람답게 죽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이에 비해 사약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수형과 참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본인과 가문에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기게 됩니다.

이에 비해 사약에 의한 사형은 사약을 들고 온 몇 사람만 보기 때문에 공개적인 불명예는 피할 수 있었지요. 명예와 명분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당시 선비들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치욕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면 임금이 사약을 내리는 것은 임금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배려이지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특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응당한 처분으로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라”하던 공공연한 사약(賜藥)은 사라졌지만 미움이나 돈 때문에 누군가를 독살하려는 사약(死藥)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최종수 연구위원(박사·기술사)은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University of Utah Visiting Professor △국회물포럼 물순환위원회 위원 △환경부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자문위원 △대전광역시 물순환위원회 위원 △한국물환경학회 이사 △한국방재학회 이사

이명철 (twomc@edaily.co.kr)

Copyright © 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