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커피 향미가 크로노스한 이유 [박영순의 커피 언어]
입력 2022. 06. 25. 19:01기사 도구 모음
커피테이스팅을 설레게 하는 요인 중에 '반전(reversal)'이 있다.
탕약처럼 시커먼 커피 한 모금이 달콤한 산미를 펼쳐내고 꽃 향을 은은하게 마음속으로 퍼트리는 것은 극적인 전환과 다름없다.
향미를 보다 극적으로 피워내기 위해 커피를 입안 구석구석 돌리다 보면, 촉감으로 인한 지각의 변화무쌍함에 놀라기도 한다.
한 잔에 담긴 커피의 맛이 시간이 흐르며 달라지는 것은 비단 향미 성분들이 가수분해되면서 바뀌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커피를 음미할 때, 한 시점에서 향은 향으로 끝나고 미각은 미각대로 다섯 가지(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 정체성으로만 감지되는 게 아니다. 향과 미각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향미(Flavor)가 되고, 여기에 시각-청각-체성감각 등 모든 감각이 영향을 주고받아 종합적인 인상을 형성한다.
감각들이 다른 영역을 넘나들기 때문에 한 잔의 커피에서 반전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칸딘스키만이 공감각을 누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청각이 시각을 자극하고, 소리를 통해 맛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은 과학적인 현상은 아닐지라도 자연의 이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에티오피아 내추럴 커피를 마실 때와 부룬디 워시드 커피를 마실 때 떠오르는 색상이 각각 다르다. 커피 한 모금이 입으로 들어와 시각신경을 자극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색을 느낀다.
때론 커피마다 마음속에서 들려주는 소리도 다르게 자극된다. 인도 몬순커피를 마실 땐 묵직한 종소리가 산 넘어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고, 콜롬비아 라루이사 무산소발효 커피를 머금었을 땐 경쾌한 바이올린 선율이 바람에 실려 오는 듯하다.
향미를 보다 극적으로 피워내기 위해 커피를 입안 구석구석 돌리다 보면, 촉감으로 인한 지각의 변화무쌍함에 놀라기도 한다. 혀와 점막을 누르는 무게감이 커피마다 다르고, 같은 커피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기름과 미세한 섬유질이 유발하는 촉감은 커피가 지닌 산미에 따라, 향기에 따라, 그리고 그로 인한 단맛의 뉘앙스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시시각각 다른 국면을 연출하는 향미의 세계는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만큼이나 무한하다.
한 잔에 담긴 커피의 맛이 시간이 흐르며 달라지는 것은 비단 향미 성분들이 가수분해되면서 바뀌기 때문만은 아니다. 온도에 따라 감지되는 신맛, 쓴맛, 단맛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만도 아니다. 감각끼리 이루고 있는 하모니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면서 맛이 주는 인상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커피가 지닌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에 다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함으로써 반전을 거듭하기도 한다. 식어가는 커피의 산미가 강해지면 혀에 감기는 질감이 달라진다. 질감이 다르게 감지되면 단맛에 대한 느낌도 변하고 심지어 피워내는 향의 양상도 달라지는 듯하다.
한 잔의 커피가 불러일으키는 다이내믹함을 무시하고 한 지점의 인상만을 포착해 그 커피를 정의하는 관례는 바뀌어야 한다. 2021년 월드브루어스컵에서 맷 윈턴이 우승한 비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향미의 속성을 아울러 감상하는 세계를 보여준 덕분이다.
커피는 잔 속에서 멈춰 있지 않는다. 고요하지만 반전이 펼쳐지는 긴장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커피 향미를 감상하는 일이란, 카이로스(kairos)하지 않고 크로노스(kronos)하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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