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약할 때도 아름다움은 있다[영감 한 스푼]

김태언 기자 2022. 6.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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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다시 마법을 걸다
안녕하세요. 동아일보 김태언 기자입니다.

근래에 소원 빌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1월 1일 이후로 소원을 잊고 있던 저는 최근에 다시 새 소원을 빌었습니다. 장 미셸 오토니엘(58) 개인전을 갔다가 황금 목걸이가 걸린 나무를 보고나서였습니다. 소원이 적힌 리본을 묶어둔 위시트리처럼 그 나무가 왜인지 제 바람을 들어줄 것만 같더라고요.

어떤 소원은 허무를 남기기도 하지만, 대개의 소원은 희망을 줍니다. 저 또한 오토니엘의 작품 덕에 그날을 조금 더 밝게 보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 작가가 희망을 말하는 데에는 단순치 않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시작하려 합니다. 이야기가 끝나면 여러분도 소원을 빌어보세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어도 괜찮고, 누군가를 위한 것이어도 좋습니다.


세상에 다시 마법을 걸다

서울시립미술관 장 미셸 오토니엘

1. 오토니엘은 연인의 죽음 이후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그러다 연약하고 불안해 보이는 유리를 보며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2. 작가는 깨지고 흠이 난 유리들이 아름다운 조각이 되어가는 과정을 몸소 지켜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더 나아가 많은 이들과 치유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미술관 밖 공간에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3. 오토니엘은 작품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지만, 그것이 단지 한순간 아픔을 잊게 하는 신기루가 되는 것을 바라진 않았다. 서로 교유하는 작품들을 보며 긍정을 느끼고 현실에서 나아가자고 전한다


○상실의 시간에서 발견한 유리

한 남학생이 돌연 사랑에 빠집니다. 상대는 사제를 꿈꾸던 남성이었습니다. 이 남학생은 사랑하는 상대를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신학대학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누차 이야기하던 것은 순결이었습니다.

종교적 교리에 어긋나는 이 사랑을 그의 연인은 고뇌했던 듯합니다. 연인은 달리는 기차 앞으로 차를 돌진시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갑작스러운 상실과 끝도 없는 우울. 20대 청년의 삶은 뿌리부터 흔들렸습니다. 오랜 기간 혼자 어둡고 축축한 터널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삶은 침잠되어 갔죠.

장 미셸 오토니엘, 사제복을 입은 자화상, 1986

실의 속에서 발견한 것은 유리였습니다. 쉽게 깨지는 것. 불이 닿으면 언제든 변형되는 것. 약하디약한 유리에서 그는 불안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거죠.

그는 깨진 유리 파편들과 얼룩진 구슬을 모았습니다. 자신과 닮아 보였던 연약한 유리 조각들은 어느새 빛나는 조각이 됐고, 그 모습은 가히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슬플 정도로 찬란한 조각들을 만들어가며 그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유리 연금술사’로서 장 미셸 오토니엘의 역사가 시작된 겁니다.

그중에서도 오토니엘이 초창기부터 만들어온 형태는 목걸이입니다. 1997년, 그는 에이즈로 사망한 예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벌입니다. 애도와 치유의 뜻을 지닌 빨간색 목걸이 1000개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사진을 찍은 거죠. 이 목걸이를 작가는 지금까지도 걸고 다닌다고 합니다.

장 미셸 오토니엘, 상처-목걸이, 1997


○일상 속 열린 마법의 문

오토니엘이 고통으로 밑바닥을 허우적대면서 발견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는 소통이었습니다. 시간의 힘만큼이나 강한 것이 주변인들과의 교류였기 때문이지요. 어디선가 과거의 자신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을 어떤 이에게 이제는 작가 본인이 위안이 되고 싶었나봅니다. “내게는 미술관을 나서서 거리로 나가는 비전과 열망이 있다”며 공공시설이나 야외 설치 작업을 활발히 진행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업이 프랑스 파리 지하철 개통 100주년을 기념해 팔레 루아얄-루브르 박물관역에 설치한 ‘여행자들의 키오스크’입니다. 그저 역에 들어가는 것일 뿐인 행인들은 이 작품 덕에 마법 세계에 발을 디디는 느낌을 받았을 듯 합니다:)

장 미셸 오토니엘, 여행자들의 키오스크, 2000, 출처: 에스빠스리좀


장 미셸 오토니엘, 베르사유 정원 내 물의 극장에 설치된 아름다운 춤, 2015, 출처: 위키피디아


이런 마술 같은 작업이 펼쳐지고 있는 곳이 바로 덕수궁입니다. 연잎으로 뒤덮인 덕수궁 연못에는 스테인리스 스틸에 금박을 두른 ‘황금 연꽃’ 4점이 반짝입니다. 더불어 연못 중앙에 있는 섬의 소나무에는 ‘황금 목걸이’ 3점이 걸려있죠.

덕수궁 연못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사실 작가는 기획 초기에 더 많은 작품을 설치하려 했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의 정원이 자연을 압도하지 않는 점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작품 규모를 줄였지만요.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들이 “무심히 지나쳤던 자연을 다시 한 번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조각이 없었다면 연못 속 노송 유심히 보거나 둘레를 돌며 연못을 관찰하지 않았을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바로 마법이 아니었을까요?

○환상, 그 너머 치유와 희망

화려함 덕에 오토니엘 작품과의 첫 만남은 순간적인 환상을 맛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오토니엘은 잠깐의 도피처를 선물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둡니다. 그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현실세계에서 다시 한 번 경이와 마법을 경험하고 현실을 마주하고 꿈꿀 수 있는 내적 에너지를 얻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치유 받고, 현재를 긍정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지요.

이번 전시 대표작인 ‘푸른 강’도 그렇습니다. 어두운 전시장이라 마치 달빛을 받아 발광하는 물너울 같습니다. 황홀하지요.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유리벽돌들에는 미세한 기포와 불순물이 보입니다. 7500여 장 각각이 조금씩 형태나 빛깔이 미묘하게 다르기도 하고요. 취약한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겸허해집니다.

장 미셸 오토니엘, 푸른 강, 2022, 청색 인도 유리 벽돌, 26×7.1m,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푸른 강’ 위로는 작가 고유의 매듭 연작 14점이 놓여있습니다. 이들 작품은 서로를 반사하면서 각자의 모습을 비추지요.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서로가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고 수용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꿈의 무한대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과 인연의 영원성을 말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여러분도 견디기 힘든 시간을 버텨보신 적이 있으셨겠죠. 그때 당신의 모습은 어땠나요? 스스로가 하잘 것 없어 보이고, 불안해하는 자신이 작아 보이고, 언제 이 고통이 끝날지 몰라 두려워하셨을 테죠.

또 한번 어려움에 부닥친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지금 이 순간을 떠올려봅시다. 무르고 불완전한 것도 언젠가 세상 앞에 떳떳이 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상처와 나약함이야말로 아름다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우리는 눈으로 확인했으니까요.

그럼에도 괴로움에 몸서리칠 누군가를 위해 오토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세요. 세상은 경이로움의 원천입니다. 시간을 내어 자연을 바라보세요. 이것은 당신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전시 정보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2022.06.16~2022.08.07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61)

회화, 조각, 설치 등 7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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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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