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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대법원 '인혁당 배상' 판결 뒤집자 피해자 덮친 '빚고문'

CBS노컷뉴스 송영훈 기자 입력 2022. 06. 26. 07:03 수정 2022. 06. 26.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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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선고공판. 연합뉴스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아마 인혁당 사건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할 겁니다. 1974년, 유신 정권이 무고한 시민들을 붙잡아 각종 고문을 가해 진술을 받아내고, 그것을 토대로 '국가를 전복하려 한 반(反)국가 단체'라는 혐의를 적용해 8명에 대해서는 사형까지 집행한 최악의 국가폭력 사건입니다.

34년 만에 국가의 불법 행위가 인정돼 무죄가 선고됐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고문은 불과 엿새 전까지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빚고문'입니다. 국가가 보상금 계산을 잘못했다며 이들에게 받은 돈을 뱉어내라고 한 것인데, 피해자들이 반발하자 국가는 이들의 집까지 경매 시장에 내걸었습니다.

국가 폭력 피해자들이 최근까지도 국가로부터 고통을 당하도록 만든 당사자가 바로 2011년 대법원인 셈이 됐습니다. 우리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은 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심·2심 모두 뒤집은 2011년 대법원…이유는 "시간이 오래됐다"

국가 고문에 의해 자백으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들은 2008년, 34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리고 곧장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섭니다.

그리고 2009년 6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9민사부는 국가에 의한 고문 행위를 통한 자백 등을 인정하며 정부에게 손해배상을 명령합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당시 재판에서 정부는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의 기간이 소멸됐다'라며 청구권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불법 체포가 이뤄진 1974년 5월 1일부터 5년 내에 손해 배상을 청구해야 했는데, 한참 뒤에 했기 때문에 국가에 배상 책임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2009.06.19 서울중앙지법 제9민사부 '손해배상 소송' 선고심 中
재판부
"중앙정보부의 주도적 계획 아래 극심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해 허위 자백을 했고, 재판 과정에서 공소 사실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 (당시) 대법원에서도 잘못된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시킨 점 등을 모두 종합해보면 피해자들이 무죄가 선고된 2008년 1월 무렵까지 국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반인권적, 조직적 불법 행위를 자행한 정부가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정부의 주장을 배척한 1심 재판부는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와 함께 인혁당 재건위 사건 판결이 확정된 다음날인 1975년 4월 9일부터 2009년 6월 19일까지의 '지연 손해금(이자)'도 배상하라고 판결합니다. 그렇게 1심 판결 직후 배상금이 가지급됩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반발해 즉각 항소합니다. 특히 1975년 4월 9일부터 계산된 '지연 손해금' 범위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정부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채무는 기한의 정함이 없는 채무이기 때문에 민법 제387조 2항에 따라 이행 청구를 받은 때부터 지체 책임이 생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였던 서울고등법원 제9민사부도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를 모두 기각합니다.

2009.11.26 서울고등법원 제9민사부 '손해배상 소송' 선고심 中
재판부
"민법 제387조 2항이 '채무 이행의 기한이 없는 경우에 채무자는 이행 청구를 받은 때부터 책임이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예외적으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채무는 공평의 관념에서 별도의 최고(催告)가 요구되지 않고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 발생과 동시에 지체 책임을 진다고 보는 것이 상당합니다"


"정부는 피해자들을 1974년 4월 25일 경 구속영장 없이 위법하게 체포·구속한 이후 변호인 접견교통권 침해, 고문을 통한 자백 확보, 위법한 공판 절차 등 불법행위를 해 1974년 4월 25일 경부터 이미 피해자들에게 경제적, 신체적, 손해가 발생했기에 정부의 주장은 이유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채무는 손해가 발생한 시점부터 시작이라는 겁니다.

2심 재판부가 언급한 '최고(催告)'란 법률적으로 상대에게 일정한 행위를 하도록 독촉하는 재촉, 통지 등의 행위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최고를 기준으로 지연 손해금이 계산되지만, 인혁당 사건처럼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가 발생한 경우 최고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정부는 다시 불복해 상고했고, 2011년 1월, 대법원은 1·2심과 달리 정부의 손을 들어줍니다. 피해자에 대한 위자료 지급은 인정했지만, 지연 손해금에 대해선 계산법이 잘못됐다고 판단했습니다.

2011.01.27 대법원 제3부 '손해배상 소송' 선고심 中
재판부
"물론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채무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별도의 이행 최고가 없더라도 채무 성립(불법행위 시점)과 동시에 지연 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35년이란 장기간의 세월이 지나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서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도 무조건 불법행위 시점부터 지연 손해금이 발생한다고 보는 경우엔 현저한 과잉 배상 문제가 제기됩니다"

 
"장기간 세월이 지나서 위자료를 산정함에 있어 반드시 참작해야 할 변론종결 당시 통화가치에 상당한 변동이 생긴 때에는 예외적으로라도 지연 손해금은 위자료 산정 기준인 변론 종결 당일부터 발생한다고 봐야합니다"

결국 35년 동안 통화 가치에 큰 변화가 생겼으니 지연손해금은 1975년 4월이 아닌  2009년 11월부터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단이었습니다. 결국 인혁당 피해자는 졸지에 30여 년 치 지연손해금을 뱉어내야 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이어진 11년 간의 빚고문…이제야 끝났다 


연합뉴스

우니나라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단이 나오자 이제는 정부가 역으로 피해자들에게 '돈을 뱉어내라'며 소송에 나섭니다. 1심 재판 승소 뒤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가지급 받은 피해자들에게 빚고문이 시작된 겁니다.

특히 국정원은 2013년 7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게 '부당 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을 냅니다. 국가 폭력 피해자에게 지급된 배상금에 대해서 '부당 이득'이라며, 어찌 보면 상당히 모욕적일 수 있는 단어까지 써가면서 말이죠.

대법원의 판단을 앞세운 국정원은 피해자들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승장구했고, 반환 거부로 맞서던 피해자들은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인혁당 사건 피해로 받은 위자료보다 이제는 뱉어 내야 할 돈이 더 많아지게 됐습니다. 정부는 2017년엔 피해자 이창복 씨의 집을 경매에 넘기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부터 이어진 이 싸움은 박근혜 정권을 지나 문재인 정권 때까지도 이어졌습니다. 지난 2020년 법원이 조정안을 내놓으며 중재에 나섰지만 국정원은 '국가가 받아야 할 돈을 포기하면 배임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의 답변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과 엿새 전인 지난 20일, 피해자들에 대한 11년 간의 빚고문이 끝났습니다. 법무부가 국정원을 설득해 법원의 조정안을 수용한겁니다. 지난 4월, 법원이 '이창복 씨가 내년 상반기까지 5억 원을 정부에 상환하면, 이자 9억 6천만 원은 면제해주자'는 권고안을 제시했고, 법무부와 국정원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사진공동취재단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국가배상으로 받는 돈이 6억 원인데 토해야 할 돈이 15억 원이다. 그대로 방치할 경우 억울한 상황이 됐다"라며 "국민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데 진영이나 정치 논리가 설 자리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최대 치욕으로 꼽힐만한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34년이 지나서야 무죄를 선고한 사법부는 이번에는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이유로 11년 동안 새로운 고통을 겪도록 하는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사심없는 법리적 판단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국가와 법원이 무엇때문에 존재하는지 곱씹어보게  만드는 씁쓸한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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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송영훈 기자 0hoon@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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