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다이어리]"내 몸을 내버려둬라" 낙태권 폐기에 美 시끌

뉴욕=조슬기나 입력 2022. 6. 26. 13:05 수정 2022. 7. 1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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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EPA연합뉴스]

[아시아경제 뉴욕=조슬기나 특파원]"내 몸을 내버려둬라.(Leave my body alone)" "그녀의 몸이고, 그녀의 권리이고, 그녀의 선택이다.(Her body, her rights, her choice)"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이른바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한 2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인근에는 밤 늦은 시각까지 게릴라 시위가 잇따랐다. 곳곳에서 플래카드를 든 시민들이 나타나 대법원의 판결을 규탄하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낙태권을 옹호하는 민주당이 강세인 뉴욕의 경우 이번 판결 폐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대표적 지역으로 손꼽힘에도, 수 많은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목소리를 높였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희극 'POTUS'에서는 낙태 권리에 대한 대사가 나오자마자 기립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결국 이날 공연은 중간에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낙태권을 두고 미국 전역이 시끄럽다. 대법원이 임신 6개월 이전까지 여성의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약 50년 만에 번복한 탓이다. 이제 앞으로 낙태권 존폐 결정은 각 주(州) 정부 및 의회의 권한으로 넘어가게 된다. 미국 내에서도 각 주에 따라 낙태가 허용되느냐 마느냐 판단이 달라지는, 미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진보와 보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인 낙태권을 둘러싸고 미국이 둘로 쪼개진 모습도 확인되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성파업(#sexstrike)이라는 해시태그도 확산하고 있다.

토요일인 25일 뉴욕 맨해튼 유니온스퀘어에서 열린 시위에 참석한 캐롤라인 힐리는 여성의 자아결정권이 존중 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을 쏟아 냈다. 성폭력 피해자인 마야 뎀리는 "만약 강간으로 임신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낙태권 보장단체인 플랜트 해런트후드는 이번 판결로 약 3600만명의 가임기 여성이 낙태권을 박탈 당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날 버몬트주 의사당에서는 7개의 창문이 부서졌고 건물 전면에 '낙태가 안전하지 않다면 당신도 안전하지 않다'는 스프레이 페인트 메시지가 남겨졌다. 몰리 그레이 버몬트주 부지사는 기물 파손 행위를 규탄하면서도 "주민들이 전날 대법원 판결에 깊은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논설실 명의의 사설을 통해 "기본권에 해당하는 낙태는 주 정부 및 의회가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라며 임신을 한 모든 여성에게 관련된 낙태가 미국 내 지역에 따라 규정이 다르다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비판했다.

반면 낙태 금지론자들은 일제히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했다. 낙태 금지를 주장해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폭스뉴스에 출연해 "헌법을 따른 것이자 오래 전에 했어야 할 권리를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도 "헌법과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한 역사적 승리"라고 환영했다.

일부 주는 즉각 낙태 금지 조처를 단행한 상태다. AP통신은 판결이 나온 직후 앨라배마, 오클라호마, 애리조나, 아칸소, 켄터키, 미주리, 사우스다코타, 위스콘신, 웨스트버지니아, 루이지애나 등에서는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속속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주 가운데 상당수는 대법원의 기존 판례 파기시 낙태 규제를 시행할 수 있는 '트리거 조항'을 담은 법을 적용 중이다.

낙태권 옹호단체인 미 구트마허연구소는 이러한 트리거 조항이 있는 주를 비롯해 미국 내 50개 주 중 26개 주가 낙태를 사실상 금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켄 팩스턴 텍사스주 법무장관은 대법원의 판결이 이뤄진 이날 하루 휴무를 결정하고, 앞으로도 연례 휴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낙태 규제가 주별로 달라짐에 따라 당장 임신한 여성이 낙태가 허용되는 주로 이동하는 원정 시술이 횡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원정 시술이 여의치 않은 이들의 경우 무허가 불법 시술을 받기 위해 뒷골목을 전전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쏟아진다.

조지아주에 거주하는 80대 마릴린 마이클스씨는 NYT에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나온 1973년 보다 훨씬 앞선, 1956년에 불법 낙태를 하며 겪었던 위험했던 상황을 전하며 "불법 낙태가 벌어지고 여성들은 죽을 것"이라고 전했다. 낙태가 금지된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불법 낙태에 의지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개인이 낙태를 위해 주 경계를 벗어날 수 있느냐 여부를 두고 법적 다툼이 일 가능성도 크다. 남부 지역의 경우 주 경계에 그치지 않고 국경을 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낙태를 돕는 멕시코 시민단체 '네세시토 아보르타르'에는 미국 여성들의 소셜미디어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낙태법이 선거 쟁점으로 떠오르며 향후 정치권 논쟁도 한층 가열될 전망이다. 미국 내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에 이어 동성혼, 피임 등과 관련한 기존 대법원 판결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보수 성향인 토머스 클래런스 대법관은 전날 대법원 판결에 따른 보충 입장을 통해 "향후 우리는 그리스월드, 로런스, 오버게펠을 포함한 앞선 판례들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각각 피임과 동성혼, 동성 성관계 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다.

대법원 판결 직후 낙태를 불법화한 루이지애나주 출신이자 현재 뉴욕서 거주 중인 에밀리 씨는 "자신의 신체와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을 뒤집은 것이 참담하다"면서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신시내티에 살고 있는 스티비 밀러씨는 6월 성소수자 자긍심의 달(프라이드먼스) 기념 퍼레이드를 앞두고 "다음은 우리"라며 우려했다.

국제적으로도 낙태권 폐기는 개인의 결정권을 빼앗는 것이자 인권 후퇴라는 비판 목소리가 잇따른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은 일제히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유엔인구기금(UNFPA)도 성명을 내고 낙태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경우 임신부의 건강과 생명이 심각하게 위협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 애플, H&M,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낙태가 금지된 주에서 직원들의 낙태권을 보장해주기 위해 원정 시술 등 비용을 지원해주겠다는 기업들도 줄 잇고 있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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