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위해 애써 줘 감사.. 엄마를 보면 저는 행복한 사람" [차 한잔 나누며]
딸 은혜씨, '우블스' 출연해 열연
발달장애인 첫 주·조연 역할 소화
인기 비결 묻자 "저절로 좋아져"
'꿈' 물으니 "다 이뤄진 것 같다"
캐리커처 작가로 4000명 그리기도
일상 촬영한 다큐 '니 얼굴' 개봉
어머니 장씨 "현실모녀 모습 담겨
딸도 같은 인간이란 것 봐줬으면"
“많이 놀랐나봐. 쌍둥이 언니, 영희. 다운증후군.“ 극중에서 언니를 소개하는 동생(한지민)의 말에 남자친구(김우빈)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연기를 본 이들 대부분 비슷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발달장애인 배우가 주·조연급 역할을 맡은 것은 그가 처음이다. 인기 배우가 된 ‘은혜씨’와 그의 ‘평생 매니저’ 엄마 장차현실(59)씨를 만나 요즘 일상을 들어봤다.
포털사이트에서 은혜씨를 검색하면 화려한 프로필이 뜬다.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4000명의 얼굴을 그린 캐리커처 작가’, ‘컬러링북 작가’, ‘유명 드라마 조연 배우’, ‘극장 개봉 다큐멘터리 주인공’. 화려한 이력 답게, 지난 20일 세계일보 스튜디오에서 만난 은혜씨는 조금 피곤한 표정이었다. 드라마 출연 후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데다 그의 일상을 담은 다큐 ‘니 얼굴’이 개봉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도 인터뷰 전에 뉴스 생방송에 출연하고 오는 길이었고, 인터뷰 후에는 시사회 일정이 있었다.
장씨가 “이런 관심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고 하자 옆에 있던 은혜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전 알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 하냐는 말에는 “타고 났어요.”, 사람들이 왜 은혜씨를 좋아하는 것 같냐는 질문에는 “글쎄. 저절로 좋아진 것 같아요“라는 다소 새침한 답이 돌아왔다. ‘밉지 않은’ 귀여운 잘난척. 인터뷰 내내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은혜씨의 답변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23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니 얼굴’에는 은혜씨가 수년간 경기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사람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이야기가 담겼다. 더우나 추우나 은혜씨를 따라다니던 아빠 서동일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잡고 연출했다. 다큐 속 은혜씨는 그간 대중매체에서 보이던 장애인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통상 영화나 드라마 속 장애인은 ‘순수하고 착한’ 이미지로 그려지고, 주인공의 슬픔을 부각하거나 감동을 극대화하는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이런 감동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당황할 것이다. ‘니 얼굴’ 속 은혜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칫’, 가장 많이 보이는 표정은 엄마를 ‘흘겨보는’ 표정이기 때문이다.
은혜씨는 시종일관 엄마와 티격태격한다. 밥을 먹는 은혜씨 옆에서 엄마가 식단 이야기를 하자 은혜씨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엄마를 쳐다본다. 심상치않음을 느낀 엄마가 “알았어, 알았어”라며 작전상 후퇴를 하지만 은혜씨가 나지막히 말한다. “어우 진짜 체하겠다.” 엄마의 잔소리가 못마땅하고 참견이 귀찮은 영락없는 ‘현실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온다.
요즘에도 이렇게 싸우냐는 말에 장씨는 “어제 아침에도 대판 싸웠다”며 웃었다. 장씨는 “드라마에서는 착하게 나온 것 같다”면서도 “영화 속 모습들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기쁠 때 기뻐하고, 화낼 때 화내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지만 발달장애인은 이런 것들이 억눌린다”며 “영화를 통해 은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것을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하는 편한 사이이지만, 장씨는 누구보다도 은혜씨를 존중한다. 평소 딸을 ‘은혜씨’라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장씨는 “은혜가 20살이 되고 성인이 됐는데도 장애인이란 이유로 사람들이 말을 쉽게 놓고 아이 취급을 했다. 그런걸 보고 조금 화가 나서 내가 먼저 ‘은혜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며 “주변 사람들한테 ‘이 사람도 어른’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비장애인이 은혜씨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해야할 지 몰라 당황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장애인을 만났을 때 적지 않은 이들이 혼란을 느낀다. 장씨가 “누군가 널 만나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도와줘야 할 것 같아?”라고 묻자 은혜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아니. 이해를 해주는 게 좋아.” 장씨는 “발달장애인은 소통의 속도가 다를 뿐이다. 말을 천천히, 짧게 하면 소통할 수 있다”며 “요즘 은혜씨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주는 것을 보고 좀 감동받을 때가 있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 발달장애인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구나, 우리가 하던 속도를 좀 느슨하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런 작은 파급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씨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원래 3시간30분짜리 가편집본에는 장씨와 은혜씨가 비슷한 분량이었지만, 서 감독은 장씨에게 “당신 모습을 빼자”고 제안했다. 장씨는 “제 모습을 빼니 아름다운 은혜가 온전히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나도 은혜를 ‘장애인’ 딸로만 봤다. 하지만 시선을 바꾸면 존재의 존엄함이 보인다. 그것이 관계의 확장”이라며 “영화를 통해 다른 이들의 마음에도 이런 확장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은혜씨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고 거들었다. “전국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잘 만났지! 오늘 점심도 네 카드로 계산 했어!”
엄마는 어떤 사람인지 묻자 은혜씨는 천천히, 그러나 신중한 말투로 여러 감정을 꺼냈다. “저를 위해 애쓰고, 힘들었지만…. 사랑스럽고, 감사하는 마음. 저는 엄마를 보면… 행복한 사람.” 은혜씨를 바라보던 장씨의 눈가가 붉어졌다. “나도 너를 낳아서 행복해.”
하지만 이런 감동적인 분위기도 잠시. 뒤이은 장씨의 말에 인터뷰 현장은 금세 웃음바다가 됐다.
“근데 짜증 좀 내지마.”
“내가 언제?”
“아침에 일어나라고 하면 짜증내잖아!”
투닥거리던 은혜씨가 또다시 ‘생색’을 내며 “으이그, 나 때문에 살지? 오래 살아!”라고 외치자 장씨도 “너도 오래 살아!”라고 말했다. 무심한 듯 하지만 진심이 꾹꾹 묻어나오는, 영락없는 ‘현실 모녀’의 대화였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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