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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을지면옥 어디갔어?" 37년 맛집도 헐렸다, 착잡한 힙지로

최서인 입력 2022. 06. 26. 19:14 수정 2022. 06. 27.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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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어디로 갔다는 거야 을지면옥이?”

26일 정오쯤 서울 중구에 있는 을지면옥 앞에서 만난 최모(61)씨의 얘기다. 최씨는 이날 남편과 함께 을지면옥을 찾았다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요즘 요리들이 대부분 달고 짠데 을지면옥은 음식이 담백해 즐겨 먹었다”며 “영업을 종료한다는 기사를 보고 마지막으로 먹으러 왔는데 벌써 문을 닫았을 줄은 몰랐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37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을지면옥은 25일 점심 장사를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했다.


냉면 삶던 솥도, 손글씨 간판도 ‘안녕’


26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면옥이 전날 마지막 영업을 마친 후 집기를 정리하고 있다. 최서인 기자

26일 오후 을지면옥 앞 차로엔 1t 트럭 두 대가 서 있었다. 을지면옥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좁다란 복도 입구로 반죽 기계와 업소용 냉장고, 에어컨 등의 집기가 빠져나왔다. 냉면을 삶던 솥과 스테인리스 조리대, 선반 등이 재활용센터에 보내 처분하기 위해 차곡차곡 트럭에 실렸다. 냉면 그릇, 제면기 등은 계속 쓰기 위해 미리 빼 두었다고 한다.
앞 건물에 가려 있던 을지면옥을 찾는 이정표와 같던 투박한 손글씨 간판은 떼어져 있었다. 새 점포를 찾으면 다시 걸릴 예정이라고 한다.
26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면옥 앞에 냉장고, 선반, 조리대 등 집기류가 꺼내져 있다. 최서인 기자

을지면옥이 있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세운지구) 3-2구역은 지난 2019년부터 보상과 철거 등 재개발 절차가 진행됐다. 시행사와 을지면옥이 합의에 실패하면서 건물 인도 소송이 진행됐다. 시행사는 부동산 명도 단행 가처분 신청을 냈고 최근 2심에서 법원은 을지면옥이 건물을 인도하라고 명령했다.


‘을지면옥도 헐리는구나’…착잡한 공구상들

“을지면옥 일이 남 일 같지가 않아. 거기 30년 단골이었으니까. 오늘 아침에 가보니 벌써 싱크대를 다 빼고 있더라고요.”

청계천 인근에서 전자상을 운영하는 김선영(68)씨의 얘기다. 16세에 취업해 52년 동안 청계천을 지킨 김씨는 이날 오전 을지면옥의 퇴장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청계천에 가면 못 만드는 게 없다’던 시절을 거쳐 일흔을 바라보는 현재, 김씨는 청계천 변에 주상복합 건물이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김씨는 8개 구역으로 나뉘어 진행 중인 세운지구 재개발에 대해 “세운상가의 양 팔다리가 잘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 표현했다. 그는 “건너편 아파트에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하면 ‘지저분한 거 빨리 개발하라’고 이야기할 게 분명하다. 온 사방이 다 무너지고 있으니 여기도 얼마나 버티겠냐”며 “지금 남은 곳들이라도 청계천에서 살아나갈 수 있게 리모델링 등 활성화 정책을 펴줬으면 하는 게 간절한 바람”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중구의 세운지구 2구역(우측)과 세운지구 3구역(좌측)은 청계천을 두고 나뉜다. 세운지구 3-4, 4-5 구역에는 주상복합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 최서인 기자


을지면옥 인근에서 35년간 공구상을 운영해 온 양철형(59)씨는 “우리도 언젠가 떠나야 하는 입장에서 30~40년간 있었던 을지면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게 슬프다. 하나의 가게이지만 그 안에 전통이 있는 게 아니냐”고 안타까워했다.


“장인들과 예술가 공존하는 곳…생태계 보전해야”


지난 5월 26일 서울 중구 청계천 세운교에서 '서울시 산업생태계 보호 계획 이행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을지로를 ‘힙지로’로 만들어 온 젊은 세입자도 착잡하기는 매한가지다. 예술가, 디자이너 등이 연합해 만든 ‘청계천 을지로 보존연대’와 같은 단체는 지난달 26일 기자회견을 열고 “청계천 일대는 30년 이상의 숙련 기술자들과 유통상가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예술가들과 공대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며 “예술과들과 숙련 기술자들이 공존하는 산업생태계를 부수지 말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페인트칠해 봐야…”


반면 재개발을 ‘어쩔 수 없는 시대 흐름’이라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청계천에서 20년간 공구상을 운영해 온 홍모(58)씨는 “이미 새 건물들이 쭉쭉 생겨나고 있는데 쓰러져가는 건물에 페인트칠한다고 해도 방도가 없다”며 “여기서 돈도 벌었고 나이도 먹었으니 가게를 그만두게 돼도 아쉬운 건 없다. 미래를 위해서는 재건축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어 전자상을 운영하는 박모(42)씨는 “재생 사업은 모래 위에 모래성을 짓는 것이라고 본다. 노후화된 건물이니 충분한 대화와 보상이 있다면 재개발을 굳이 반대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까지 약 1km를 잇는 공중보행로 사업은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2014년부터 진행됐다. 1단계 구간이 설치 완료됐지만 세운상가 개발 기조가 짙어지며 철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서인 기자


서울시가 지난 4월 발표한 ‘녹지생태도심 재창조 전략’은 세운상가에서 진양상가까지 이어지는 약 1㎞ 길이의 부지에는 일직선상의 공원을 조성하고 주변은 업무·주거시설로 개발할 계획을 담고 있다.

세운지구는 지난 2006년 오세훈 시장 재임 당시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당초 2009년 세운상가군을 철거하고 주변 8개 구역을 통합 개발할 계획을 세웠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잠정 중단됐다. 이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해 공중보행로를 설치하는 등도시재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오 시장은 지난 4월 21일 세운상가를 방문해 장기적으로 세운상가와 공중보행로를 철거할 뜻을 밝힌 바 있다.

최서인 기자 choi.seo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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