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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 정답 아닌 무수한 해답

한겨레 입력 2022. 06. 28. 15:15 수정 2022. 06. 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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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 이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집단적 자괴감은 깊은 트라우마로 우리 안에 자리잡았다. 문재인을, 조국을, 이재명을 지키는 게 민주주의를 지키는 초석이라고 믿는 이들이 생겨났다. (..) 기레기 언론 때문에 진실이 알려지지 못해 패배했다는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다. 국회 안에도, 유튜브에서도 '조국수호=검찰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은 차고 넘쳤다. 채널이 없어 민심이 돌아선 게 아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다큐 영화 <그대가 조국>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어려서는 “자기주장이 명확하다”란 말을 칭찬으로 알았다.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라고 선생님이 물으면 대부분은 고개를 숙이고 눈 마주치기를 피하는데, 그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선생님을 바라보면 나를 호명하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논쟁적인 주제일수록 단호하고 또렷하게 주관을 펼치는 게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나의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길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나이 들수록 “자신있고 명쾌하게 말하는 사람이 더 자주 틀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곤 한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것과 상대에게 그걸 납득시키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걸 시시때때로 확인한다. 나의 언어는 나의 경험세계에 갇혀 있고, 인간의 공감능력은 관심과 노력을 통해서만 확장된다.

영화 <그대가 조국>을 보았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긴 영화평도 열심히 찾아 읽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쓴 이들이 많다. “무도한 검찰권력과 기레기 언론에 대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했고, “그간 오해와 편견에 휩싸여 진실을 보지 못한 이들이 꼭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진실은 묻히고 광기로 가득 찬 대한민국”을 한탄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안타까움, 분노, 절실함이 진심이라고 믿는다. 그들 대부분은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진심을 다해 더 나은 세상을 소망하고 그걸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평범한 시민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바라는 대로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이 보게 되면 “진실이 밝혀지고” “광기가 잠재워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영화는 정경심 전 교수의 자녀 표창장 위조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다각도로 드러내려 애쓰지만, 그것으로 조국 사태의 정치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을까? 동양대 표창장이 통상적인 절차를 거쳐 발행된 것이라는 점만 증명하면 “그간의 불신과 오해”는 깨끗이 씻어질까? 그것은 마치 세월호 참사 때 청와대의 “잃어버린 7시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굿판을 벌이거나 미용시술을 한 게 아니라는 점만 증명하면 박근혜 탄핵은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낙관적이다.

민심 이반은 법적 공방 이전에, 사회경제적 박탈감과 윤리적 배신감에서 비롯됐다. 촛불정부 핵심 인사가 자신이 재직 중인 학교를 통해서 자식 스펙 쌓기에 열심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교수 부모를 두지 못한 청년과 서민들에게 안긴 낭패감은 컸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 이 사안을 조국 ‘사태’로 키운 일련의 대응방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 이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집단적 자괴감은 깊은 트라우마로 우리 안에 자리잡았다. 문재인을, 조국을, 이재명을 지키는 게 민주주의를 지키는 초석이라고 믿는 이들이 생겨났다. 서초동 일대를 꽉 메운 촛불 행렬의 열정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권력개혁의 핵심이 검찰개혁뿐인가? 권력개혁을 위한 정당개혁과 선거개혁은 실행되지 않았고 심지어 퇴행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지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한 채 강행된 검찰개혁 무리수는 명분과 실리에서 모두 밀리는 싸움이었다. 기레기 언론 때문에 진실이 알려지지 못해 패배했다는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다. 국회 안에도, 유튜브에서도 ‘조국수호=검찰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은 차고 넘쳤다. 채널이 없어 민심이 돌아선 게 아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가장 열정적이며 가장 정의롭다고 자부하는 이들일수록 자신과 다른 견해에 배타적일 가능성이 높다. 조너선 하이트는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란 부제를 단 책 <바른 마음>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덕은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눈멀게도 한다. (…) 사람이면 누구나 부족과 같은 도덕공동체 속에 빨려 들어가게 돼 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서는 신성한 가치를 빙 둘러싸고 다 같이 힘을 합쳐 왜 우리가 백번 옳고 저들은 백번 그른지 사후 논변을 지어낸다. 그러면서 상대방은 눈이 멀어 진실, 합리성, 과학, 상식을 못 본다고 여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신성한 대상을 이야기하는 순간 눈이 멀기는 모두가 마찬가지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고 완벽한 진리는 없다. 열정과 광기는 종이 한장 차이이다. 돌아가신 채현국 선생님은 “세상에 정답이란 없다. 하나뿐인 정답이란 박정희 시대가 만들어낸 용어이지, 세상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이라고 하셨다. 지금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무수한 해답’들을 모아야 할 때이다. 도덕적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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