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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부터 인생길까지 열어주신 큰 스승·시대의 어른이셨죠"

한겨레 입력 2022. 06. 28. 19:00 수정 2022. 06. 2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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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고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 영전에
지난 2020년 10월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함께한 조순(왼쪽) 선생과 필자 이정우 명예교수. 뒷편에 고인의 친필휘호 ‘천하위공’이 보인다. 필자 제공

1968년 서울대 경제학과 ‘첫 제자’ 인연
명강의로 수강생 몰려 ‘앞자리 다툼’
답안지 잃은 장남에 가차없이 ‘F학점’
‘경제학원론’ 집필 돕자 ‘5수재’ 칭찬

노무현 대통령에 정책 조언 편지도
“장보는 집사람이 최고의 경제학자”

조순 선생님이 6월 23일 별세하셨다 . 2020년 10월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를 뚫고 댁으로 찾아 뵙고 평생 살아오신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뵐 수 없다니 밀려오는 슬픔에 가슴이 먹먹하다.

조순 선생님이 서울 상대 교수로 부임한 1968년 그해 나는 마침 경제학과에 입학해 첫 제자가 되었다. 선생님의 경제학원론 수업을 들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뜻밖의 시험문제다. ‘ 대학 입시지옥에 대해 논하라’, 아니 이게 경제학 문제인가? 나중에 생각해보니 수요, 공급을 묻는 문제였던 것 같다. 그리고 2학년 때는 화폐금융론, 4학년 때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서 루이스의 저서 <경제개발계획> 을 배웠다. 선생님의 강의는 명강, 열강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조그만 느슨함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폭포수처럼 말씀을 쏟아내곤 하셨다. 학생들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경청했고, 서로 앞자리에 앉으려고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늘 맨 뒷자리에서 그래도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대학 시절 선생님의 장남 조기송군에 얽힌 일화가 기억난다. 1970년 경제학과에 입학한 조군은 전공필수인 아버지의 강의를 들었다. 기말고사를 쳤는데, 하필 조군의 답안지가 실종됐다. 학생이 분명 제출했다니, 웬만하면 재시험 기회를 줄 만한데, 선생님은 가차없이 낙제점(F) 를 매겼다. “네가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시험지가 다 도망을 갔겠느냐” 하는 질책과 함께. 이 사건은 학생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대학원 시절 나의 석사논문 심사 주심도 조순 선생님이었다. 논문을 마치고 나니 선생님 연구실로 호출이 왔다. 선생님이 <경제학원론> 교과서 집필 중이니 도와달라고 하셨다. 지금은 사라진 광화문 국제극장 뒤 고색창연한 한옥 여관에서 강호진·김승진·김중수·박종안, 4명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선생님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집필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뒤늦게 합류해서 조금 도와드렸을 뿐인데, 그 보답은 아주 컸다. 그 책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면서 경제학원론 시장을 완전 제패했는데, 특히 그 서문이 화제였다. 선생님은 통상의 서문과는 달리 ‘제자 5수재’가 책을 다 쓴 것처럼 파격적으로 칭찬을 해주셨다. 5수재라는 말 덕분에 내 후반 생애가 술술 잘 풀린 것 같다.

조교 시절 선생님은 결혼을 못한 채 미국 유학가려는 제자가 측은했는지 황송하게도 내 중매를 서주셨다. 광화문의 커피숍에서 약속을 잡았는데, 하필 그날 학교에 급한 일이 생겨 지각을 하고 말았다. 헐레벌떡 커피숍에 달려가니 선생님이 선보러 나온 아가씨와 환담을 하고 계셨다. 아이쿠 이런 실례가 있나. 그 혼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내가 운 좋게 하버드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도 다 선생님의 추천서 덕분이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정책실장으로 일할 때 선생님은 여러 차례 이 둔한 제자를 불러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셨고, 큰 도움이 됐다. 어떤 날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정책 조언 편지를 직접 써오셔서 내가 전달한 적도 있다. 이제 두 분 다 세상에 안 계시니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순 선생님은 나에게 경제학 스승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문사철의 스승, 인생의 스승이었다. 항상 한문, 역사 이야기를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바둑을 좋아하셔서 가끔 대국 상대가 되어드리기도 했다.

선생님은 부부 사랑도 남달랐다. 봉천동 자택 ‘소천서사’에 가면 인자한 사모님이 늘 옆에서 과일을 깎아주시곤 했다. 선생님 말씀이 “경제학에 한계효용 무슨 법칙 이런 거 있지만 콩나물, 과일 장보는 거 보면 우리 집사람이 최고의 경제학자야”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곤 했다. 이제 모두 아스라한 옛이야기다. 선생님은 우리 시대의 사대부, 큰 스승이었다. 20여년 강단에서 수많은 ‘조순학파’ 제자를 길러내셨고,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민선 1기 서울시장, 국회의원 등등 평생 큰 일도 많이 하 셨으니 이제 고향 강릉 땅에서 편히 쉬소서. 봉천동 부근을 가노라면 항상 저 언덕 위에 선생님이 계시지 하는 생각에 마음 든든했는데 이제 그 길을 가면 마음이 허전할 것 같다.

이정우/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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