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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고요의 이유』 이동순 "열차화통의 허연 입김, 나도 그렇게 허덕지덕 살아왔구나"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입력 2022. 06. 29.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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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쯤 어느 봄날, 몽골 대초원의 궁벽한 게르 캠프를 찾았던 시인 이동순은 낙타 떼 앞에 몽골의 전통 현악기 마두금을 들고나온 한 낙타 주인을 보게 된다. 첼로와 비슷해 보이는 마두금은 줄감개 끝을 말머리처럼 장식했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

낙타 주인은 왼손가락으로 줄을 이곳저곳 누르고 오른손으로 활대를 잡고 줄을 위 아래로 제치면서 연주를 했다. 마두금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여러 소리를 직조해 냈다. 소곤거리는 소리, 바람 소리, 소낙비 소리, 말이 콧김 내뱉는 소리, 천둥소리⋯⋯.

이를 뒤에서 찬찬히 지켜본 그는, 연주가 모두 끝난 뒤 물었다. 왜 낙타 앞에서 마두금을 연주했느냐고, 도대체 무슨 곡을 연주했느냐고. 낙타 주인의 이야기인즉슨 이러했다.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어미 낙타에게는 못된 버릇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기 새끼를 알아보지 못해서 새끼가 젖을 빨려고 하면 뒷발로 걷어차거나 때리는 것이라고. 심지어 입으로 새끼를 물어뜯는 낙타도 있다고. 주인은 어미 낙타들에게 잃어버린 모성을 기억하게 해주기 위해 마두금을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거나 우주의 질서를 노래한 몽골의 전통 음악을. 어미 낙타들은 마두금 연주를 알아듣고서 눈물을 흘린 뒤 새끼가 젖을 빨아먹도록 다리를 벌려준다는 것이었다.

2000년 무렵부터 시인 정호승과 함께 몽골에 흠뻑 빠져 몽골을 자주 찾던 그는 낙타 주인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어릴 적 어머니를 잃으면서 격랑처럼 운명으로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이때의 경험과 기억은 켜켜이 쌓여 한편의 시가 됐다.

“눈 덮인/ 알타이 산맥 너머로/ 슬금슬금 건너오는 봄바람 소리// 자작나무 가지가/ 저희끼리 몸 비벼대며/ 바람과 은밀히 소곤거리는 소리// 주인을 태우고/ 고개 너머 숨차게 달려온 갈색 말이/ 콧김 푸르르 내뱉는 소리// 새벽 게르 지붕을 밟고/ 느리게 걷다가 무엇에 화들짝 놀란 듯/ 황급히 뛰어가는 소낙비 소리// 낙타 고삐 잡은 채/ 이웃집 두 젊은이가 나직이 주고받는/ 뜻 모를 이야기 소리// 제 새끼 못 알아본/ 어미 낙타가 뒤늦게 젖꼭지 물리며/ 서럽게 우는 소리”(「마두금 소리」 전문)

분단된 한국 문학사에서 백석 시인을 호출해냈던 이동순 시인이 시 「마두금 소리」를 비롯해 63편의 시를 모아서 시집 『고요의 이유』(애지)를 펴냈다. 등단 50년을 맞은 그의 스물한 번째 시집.

이번 시집은, 「시인의 말」에서 “우리는 고요에 대한 새로운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고요에 대한 근원적 갈망과 태도, 완전한 고요, 참신하고 품격 높은 고요에 대한 통찰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류근 시인은 추천사에서 “이 시인은 풍경과 노래와 이야기가 한 몸을 이룩하는 경지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시의 맑고 투명한 몸매를 다 보여준다”며 “소리 높이지 않고 부질없는 힘 바치지 않고 시의 진정한 중심에 닿아있는 시편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할 이유를, 고요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를 깨우쳐준다”고 상찬했다.

등단 50년을 맞은 이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신의 시를 어떻게 다시 혁신했을까. 그의 시 세계는 결국 어디로 가 닿을까. 이 시인을 지난 22일 서울 혜화역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11년 전 전화로 만났던 내용도 일부 녹였다.

시 「고요에 대하여」는 고요의 의미를 철학적이고 인생론적으로 탐색한 작품으로, 시집의 중심 테마인 고요를 대표하는 시로 꼽힐 만하다.

“어떤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어서 놓여나야겠다/ 고요가 도와주리// 자신의 정당함을/ 자꾸 입증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 그냥 고요하게/ 제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겠다//...나는 이 공간을/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곳에 가서 고요를 찾았다”(「고요에 대하여」 부문)

―고요를 다룬 이 시는 언제 어떤 계기로 해서 쓰게 됐나.

“첫 돌을 맞기 전에 어머니를 잃은 뒤, 어머니가 세 번이나 바뀌면서 눈칫밥을 먹으며 안절부절 하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때 어디 숨어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미군 전투식량을 담았던 커다란 시레이션 박스 안에 들어가서 몸을 숨기거나, 구석진 다락방에 올라가서 숨어 있을 때, 가족들이 저를 어디 있는지 모를 때, 행복했다. 은둔이 주는 고요에 어릴 때부터 익숙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가족에 노출되면 잔소리하고, 까탈과 폭풍 이런 것들이 있었으니까. 나중에 교수가 되고서도 시달리는 일상에 마음의 평화를 얻어 보겠다고 시골에 집도 샀지만 진정한 고요를 얻지 못했다. 2015년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제 앞에 놓여 있는 시간을 마음껏 요리하게 되면서 비로소 고요의 참 맛과 즐거움에 익숙해진 것 같다.”

시 「새벽 닭소리」 역시 고요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새벽에 닭들이 우는 소리를 우주의 법문을 깨달았다고 외치는 소리라고 해석하는 대목에선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탁, 하고 칠지도 모르겠다.

“산성 마을에 와서/ 새벽 닭소리 듣는다/ 저 닭들은 모두가 잠든 깊은 밤/ 홀로 깨어서 홰를 치며/ 왜 저리도 큰 소리로 자꾸 외치는가/ 한참 생각하다가/ 그 사연과 까닭 문득 깨달았다/ 닭들은 밤새도록 하늘의 경전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달과 별과 바람과 구름의 운행/ 벌레소리와 안개의 조용한 이동을 보다가/ 옛날 어느 큰스님이 그랬듯이/ 한순간 알았다 알았다 되풀이하며/ 그 기쁨 못 참고 날개까지 푸드득거리며/ 통쾌한 깨달음의 소식/ 혼자 목청껏 외치는 것이다”(「새벽 닭소리」 전문)

―닭이 우주의 법문을 깨닫고 우는 것이라는 발상은 아주 참신한데.

“아들이 부산백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던 2013, 4년쯤 아들을 가까이에서 보살피기 위해 부산 금정산성 인근에 전셋집을 얻어 생활할 때였다. 산성 마을이어서 사람들이 닭을 많이 키웠는데, 새벽 4시쯤이면 어김없이 닭들이 울었다. 새벽 닭우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곤 했는데, 시원하고 청정한 환경 속에서 하늘의 법문이라는 표현이 문득 떠올라서 시를 쓰게 됐다.”

악기의 마음을 묘파한 시 「악기의 이유」는 시인이 아코디언을 비롯해 여러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해왔기에 가능한 시일 것이다.

“저 어부는/ 위험을 알고도 물속에 들어가네// 저 사냥꾼은/ 사자 코뿔소가 두려워도/ 들판에서 짐승 발자국 따라가네// 저 의로운 열사는/ 칼과 총의 숱한 위협 속에서도/ 죽음을 삶으로 여기며/ 앞으로 나아가네// 아, 불행이란/ 잠시 휘몰아친 광풍이며/ 행운은 우연에 의한 것일지니/ 아무리 큰 고난/ 휩싸인들 두려움 떨치고/ 마음 편히 가지려네// 내가 줄곧 북 치고/ 나팔 불며 손풍금 연주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일세”(「악기의 이유」 전문)

―악기의 이유랄까, 존재 의미는 쉬이 생각하기 어려운데,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일찍 떠나면서 어린 시절 매우 힘들었다. 그 시절 악기 소리를 듣거나 여자 가수 소리를 들으면, 왠지 어머니 목소리가 생각나더라. 어릴 때 형이 켜는 아코디언 소리를 들으면서 사랑스러운 악기로구나,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저 악기를 배워야지라고 생각했다. 아코디언을 1년 정도 배우고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모두 즐거워하니까 기뻐서 악기를 더 좋아하게 됐다. 섹스폰도 맹렬히 배워서 아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 다음에 장구, 판소리의 소리북, 거문고 등을 차례로 배워 나갔다. 이렇게 대여섯 가지 악기를 배우고 헤매다닌 이유는 삶에 어떤 부드러움을 채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많은 위로가 됐다. 지금도 틈만 나면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거리에 나선다. 만약 제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더라면, 만주벌판을 떠돌아다니는 유랑 악사가 됐을 지도 모른다. 실제 가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웃음).”

시 「싱거 미싱」은 일제 강점기 이래 시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한민족의 이산, 디아스포라의 슬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의 어린 날/ 부모님 따라/ 그 여러 곳 바람처럼 이사 다닐 때/ 많은 이삿짐과 함께/ 꼭 따라다녔던 짐 하나 있었지//...그 싱거 미싱/ 카자흐스탄에서 캄차카로/ 캄차카에서 다시 우수리 지방으로/ 우수리에서 사할린으로/ 사할린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거기서 다시 모스크바로/ 모스크바에서 또 깔루가 현의/ 보롭스키로// 거기서 싱거 미싱은/ 사랑하던 주인을 잃고 말았네/ 미싱을 하늘처럼 여기던/ 안주인은 지금/ 보롭스크 공동묘지/ 한쪽 모퉁이에 누워계시네/ 아직도 미싱 생각하며 누워계시네”(「싱거 미싱」 부문)

―싱거 미싱 사연을 조금 들려달라.

“싱거 미싱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30년대 무렵 아주 잘 사는 집에서나 볼 수 있던 재봉기였다. 당시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한 꿈의 기계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대여섯 번 이주할 때에도 싱거 미싱을 가지고 다니다가 끝내 주인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다. 2020년 고려인 작가 아나톨리 김을 만나보니 젠 체 하지 않고 소탈하고 다정다감한 분이더라. 일부러 응석 부리듯 여러 가지 물어보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싱거 미싱 사연은 나중에 읽은 이 분 자서전 안에 있던 내용이었다.”

참고로 싱거 미싱은 미국의 기계공 아이작 싱거가 기존의 재봉기를 개량해 만든 실용 재봉기로, 우리나라에는 1877년쯤 들어왔다. 1930년대에는 잘 사는 집에만 일부 들어왔고, 1960년대에야 일반 가정에 보급됐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시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50년의 세월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등단 50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이다. 예술가라면 모두 꾸준하게 자기 개발과 진보, 변화를 위해 악전고투하는데, 저 역시 나름대로 스물한 권의 시집을 내기까지 늘 새로움을 창조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이번 시집은 변화의 연장 속에서도 어떤 수월한 단계, 자연스러운 단계에 도달한 것 같다.”

방과 후 학교 농장에서 일하는 대신 학비를 면제 받던 대구농림고 ‘농장 장학생’ 이동순은 농장 일을 끝내면 학교 도서관을 찾곤 했다. 텅 빈 도서관 서재에는 많은 문학책이 있었고, 특히 누렇게 빛바랜 시집이 그의 눈길을 빼앗았다. 그는 도서관에서 혼자 이름도 모르는 시인부터 시작해 김기림, 정지용, 백석 등의 시를 접했다.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놀란 마음으로 시를 읽던 그의 마음 한켠에선 어떤 소망 같은 게 한 줄기 피어났다. 나도 이렇게 써봤으면.

어느 새 그는 시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조를 썼다. 무엇에 홀리듯 시에 빠져든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건 신석정의 시였다. 『촛볼』, 『슬픈 목가』, 『빙하』. 그의 시에는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비롯해 어머니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왔다. 어머니라는 말은 그의 심금을 뒤흔들어 버렸다.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층층나무 이파리에서는 어린 청개구리가 비를 피하고 앉아서 이따금씩/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청개구리처럼 갑자기 외로웠다.//...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꽃이 들어왔다./ 산수유꽃 봉우리에서 노아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히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리고갤 넘던 내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신석정, 「어머니의 기억」 부문)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머니의 배속에 있다가 한국전쟁 직후 만삭의 몸으로 피난한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를 낳은 지 10개월 만에 먼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이후 어머니가 세 번이나 바뀌는 등 굴곡진 삶은 그를 칭칭 감아버렸다. 학생 이동순은 벽에다가 신석정의 시들을 붙여놓고 외우고 또 외웠다. 이동순 시문학의 원점이었다. 그는 11년 전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문학을 하게 된 계기도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어머니에 대한 갈증, 눈물이 많았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경북대 국문학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에서 「꽃」을 비롯해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쓰던 김춘수 시인을 만났다. 김춘수는 깔끔했지만 역사주의, 민족이나 사회 등 거대 담론을 싫어했다. 이때 ‘온몸의 시학’을 주창한 참여 시인 김수영을 배우면서 리얼리즘을 보충하게 됐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그의 몸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1950년 김천에서 농부 김기봉과 이현경 부부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동순은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이 당선돼 등단했다. 198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도 당선됐다.

등단 이후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미스 사이공』, 『발견의 기쁨』, 『묵호』 등 시집 스물한 권을 펴냈다. 2003년에는 10권짜리 서사시 『홍범도』를 발간했다. 평론집으로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을 펴냈다. 김삿갓문학상, 금복문화예술상, 시와시학상, 경북문화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경북대 국문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충북대,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시에서 사람을, 역사를 빼버리면 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가 살아온 동시대의 삶의 구체적인 궤적을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애를 썼고 그 노력의 소산이었다. 초창기에는 글 한 줄, 시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시를 썼다. 세월이 갈수록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가 본래 가지고 있는 어떤 서정성에도 충실하게 됐다. 1999년 시집 『가시연꽃』을 출간하면서 서정성으로 무언가를 말해야지, 역사주의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후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고, 최근에는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확장 중이다.”

―2003년에는 10권짜리 서사시 『홍범도』를 창작했는데.

“제 할아버지는 독립투사 이명균 선생이다. 김천에서 군자금을 모아서 만주와 상해 등지로 보내다가 일경에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대 돌아가셨다.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늘 바람결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처음 할아버지를 테마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다가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을 해보자고 해서 홍범도를 택하게 됐다. 홍범도 선생은 귀족 출신이 아니라 포수 출신으로, 김좌진 장군에 가려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2000년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버클리대 등에 가서 국내에서 보지 못한 홍범도 자료를 얻었다. 늘 가슴에는 할아버지의 격려나 부추김이 있었던 것 같다.”

경북대 대학원 석사과정이던 1974년 어느 날, 고서점이 몰려 있던 대구시청 앞 골목의 한 고서점에서 매일 같이 고서점을 돌아다니던 대학원생 이동순은 우연히 낡고 빛바랜 문학전집을 마주쳤다. 바로 조선일보사에서 1930년대 당시 대표적인 문학인들의 작품만을 모아서 발간한 『현대조선문학전집』이었다. 전집에는 백석이나 박팔양 등 월북 작가의 시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숨이 멎을 만큼 놀랐다. 사진까지 보니 흥분상태에 빠졌다.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시절, 모르는 시인이나 소설가, 극작가들이 자주 나왔다. 이상했다. 당시에는 분단시대 문학사가 다룰 수 있고, 일부 없는 시인이나 작품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공부를 했을 때였다.

그는 금새 백석의 시에 매료됐다. 백석의 토속적인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서 백석의 시만 집중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백석의 백자가 세모, 석자가 네모로 표시돼 있어서 오히려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모으다보니 100편이 모여 전집을 내고 싶었다. 창비에 연락해서 내게 됐다.

1987년, 그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백석시전집』(창비)을 발간했다. 백석 시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반응이 그렇게 폭발적일지 몰랐다”고 말했다. 특히 전집을 펴내면서 첨부한 낱말풀이를 이후 연구자들이 참고한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나중에 백석이 사랑했던 김자야 여사가 찾아왔다고 하던데.

“김자야 여사는 저를 친아들처럼 여겼다. 김자야 여사가 백석과 만난 시간은 모두 5년 정도인 것 같고, 3년 정도 동거를 했다. 백석이 만주로 가서 살자고 했을 때, 만주로 따라가면 굶어 죽고 얼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백석을 애타게 만들 것에 대한 마음의 빛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백석을 따라가지 못해서 백석을 고생하게 만들었다고. 꿈에 백석이 자주 나타났다고 하더라. 김자야 여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부문을 잘 다듬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백석 평전』을 비롯해 백석 연구가 쏟아졌는데, 어떻게 보는지.

“왜곡과 오류가 적지 않은 것 같다.(몇 가지만 얘기해 달라) 백석은 이상하게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요소가 있는 것 같다. 한 작고한 연구자는 생전에 백석에 빠져서 백석의 발자취를 쫓아다녔다.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을 돌아다니며 백석 사진을 구하거나 백석 가족과 접촉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주에서 발간된 『만선일보』에 실린 이름이 없는 작가의 시를 모두 백석 작품이라고 해석하고 전집에 싣는 등 백석 작품이 아닌 시조차 백석 시로 분류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또 다른 사람은 『백석 평전』에서 김자야 여사와 길상사를 매개로 백석과 남로당과의 연루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엉터리가 많다. 그래서 최근 한 출판사로부터 제의를 받아서 『백석 평전』을 다시 쓰기로 수락했다.”

등단 50년을 맞았지만, 시인이자 평론가는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 알려지지 않는 가수 54명의 생애를 정리한 『한국 근대가수 열전』과 홍범도 장군의 논픽션 평전(가제 『나 홍범도』) 등 여러 권의 작품을 차례로 펴낼 예정. 마치 쓰러지기 전까지, 지치지 않고, 허덕지덕, 앞으로 나아가는 나귀처럼.

그래서였을까. 지난 25일 저녁 서울 덕수궁 옆 한정식집에서 안도현 및 정호승 시인과 고영구 전 국정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그가 낭낭하게 부른 노래는 이 장터 저 장터 돌아다니는 장돌뱅이의 애환을 담은 옛 노래였다. 바로 시인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 허덕지덕 살아온 나귀 같은 삶의 노래....

“등 뒤 수레에/ 제 몸보다 더 큰 짐 싣고// 가파른 언덕길/ 아등바등 오르는 나귀 한 마리// 나귀의 입에선/ 열차화통처럼 허연 입김 뿜어져 나온다// 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형제들도 모두// 그렇게 살다가 갔다/ 나도 그렇게 허덕지덕 살았다”(「나귀 한 마리」 전문)

글·사진=김용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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