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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세계일주] 시라우키의 황금빛 아침..순례자의 생명수 '공짜 포도주'

글·사진 김영미 여행작가 입력 2022. 06. 29.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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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마네루~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바위산을 병풍삼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는 시라우키가 마치 신기루처럼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모세. 그를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그는 이미 2018년에 스페인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완주했고 이번이 2번째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프랑스 바욘역. 산티아고 프랑스 길의 출발지인 생장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바욘역에서 그와 그의 친구들이 우연히 내가 잠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배낭을 두고 떠났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분들 유머감각이 남다르다. 덕분에 쉽게 친해졌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걷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들은 독일인인 토슨과 크리스토프 그리고 영국인 아드리안. 토슨은 나무로 된 긴 지팡이를 가지고 있어서 모세라고 불렀다. 모세의 기적을 만든 그 모세. 언뜻 보니 비슷하기도 한 것 같다.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이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비야투에르타를 지나 예스테야 가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밀밭 사이를 순례자들이 걷고 있다.
백설공주가 살고 있는 성, 시라우키
지금까지 6일째 그들과 함께 걷고 있다. 출발 이틀째에 독일사람 얀이 팀에 합류했다. 이제 우리 멤버는 5명. 그들 덕분에 나는 매일 일정을 홀로 고민하지 않는다. 하루의 순례길을 마치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다음날의 일정을 서로 의논한다. 어느 마을에서 쉬어갈지, 어느 마을에서 점심을 먹을지, 어느 마을에서 숙박을 할지. 그들과 함께 걸으며 즐거운 추억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편안하고 즐거운 순례길이다.
마네루Maneru에서 시라우키Cirauqui로 가는 날. 동이 트기 전부터 해가 뜨기 전에 꼭 도착해야 한다며 모세가 서둘렀다. 아무리 길게 걸어도 어둠속에선 걷지 않았는데 왜? 궁금하지만 묻지 않았다. 일부러 설명하지 않는 그 속마음이 있을 터이니. 마네루에서 시라우키까지는 걸어서 40분 정도. 거리는 채 3km가 되지 않았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그곳에선 멋진 일출을 볼 것 같았다.
정확하게 오전 7시. 다른 날보다 40여 분 이상 서둘러서 출발했다. 모세가 무척 서둘렀다. 크리스토프가 어제부터 발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는데 물집이 상당히 크게 잡혔다. 아드리안이 의사처럼 정성껏 치료를 해준다. 서로 의지하고 함께 걸으니 순례길이 더욱 의미가 있다.
중세도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마네루를 벗어나니 이른 새벽 밀밭의 초록내음이 더 진하게 밀려든다. 선선한 새벽 공기가 몸에 닿는 느낌도 참 상쾌하다. 어둠 속에서 15분 정도 걸으니 여명이 올라온다. 어제부터 유심히 보아왔던 바위산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바위산을 병풍삼아 안겨 있는 마을이 신기루처럼 우뚝 서 있다. 요새 같은 언덕 위의 성에는 꼭 백설공주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꿈속인 듯 조금씩 밝아지는 세상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간다. 한발 한발 신기루 앞으로 걸어가면서 황금빛에 취한다. 태양의 황금빛이 반사되고 있는 바위산에 둘러싸인 마을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신비롭다.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광경에 발을 옮기기가 어렵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다. 그냥 이 자리에 서서 몇 시간이고 가만히 쳐다보고 싶다. 그러나 태양은 그 자리에 머물러 주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은 아니었지만 세상을 감싸주던 황금빛은 어느 사이에 사라지고 세상은 환하게 밝았다.
에스테야 입구의 강물에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시원스럽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시라우키는 중세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아주 멋진 마을이다. 그런데 그 의미는 무시무시한 ‘살모사 둥지’란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동화와 참 잘 어울리긴 한다. 여명의 빛이 사라지고 황금색의 신비는 사라졌지만 마을은 여전히 아름답다. 마을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평범한 작은 마을. 황금빛에 둘러싸였던 신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멀리서 봐야 미인이구나!
멋진 일출을 보려고 일찍 출발한 덕분에 아침식사를 해야 하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상점도 카페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모세의 계획은 시라우키에 맛있는 빵집이 있어서 그곳에서 아침을 해결하려 했다고 한다. 빵집은커녕 작은 상점도 문을 연 곳이 없다. 간단하게 배낭에 있는 비상식량으로 시장기만 면하고 길을 계속 간다.
마을을 통과해서 고속도로에 놓인 육교를 건너니 노란 꽃이 만발했다. 유채는 아닌데 꽃내음이 어찌나 강한지 머리가 띵할 정도. 향수의 원료로 쓰이지 않을까? 추측만 한다.
모세가 전에 이곳을 지나면서 무인카페를 보았다며 안내했다. 이미 몇 분의 순례자들이 그곳에서 쉬고 있다. 어제 팔리고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오렌지와 물이 전부다. 빵은 그림자도 없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카페를 운영하는 젊은이가 수레에 식품을 싣고 나타났다. “야호~” 아침은 해결되었구나. 무인카페에서는 오렌지, 사과, 음료수, 바게트 그리고 몇 가지 과자가 전부, 아침식사로는 만족하지 못하지만 요기는 했으니 걸을 만하다.
무인카페가 있는 언덕을 넘어서니 산티아고까지는 676km가 남았다고 쓰여 있다. 갈 길은 멀지만 하루하루 걷는 즐거움이 커서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길가에 식수가 흘러가는 수도관이 있다. 이것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스페인 전역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수도관이 여러 곳에 있고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산티아고까지 남아 있는 거리를 알려주는 시그널. 시라우키의 무인카페에서 산티아고까지는 676km.
양귀비들판, 에스테야
예리계곡Valle de Yerri은 온 세상이 양귀비로 뒤덮였다. 유독 진한 붉은색이다. 치명적인 유혹의 색감이다. 꽃에 취해서 걷다 보니 비야투에르타Villatuerta마을을 지나고 드디어 에스테야Estella 입구. 에스테야는 바스크어로 ‘별’이라는 뜻. 1090년 만든 계획도시로 바스크인, 유대인, 프랑스인 등 다양한 인종이 살고 건축물도 다양하고 대성당이 4개나 되어서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한 도시이다. 많은 순례객들이 에스테야에서 하루 묵어간다. 마을 입구 강물에서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시원스럽게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나도 풍덩 뛰어들고 싶다. 태양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에스테야 마을 입구 앞 식수대에 써 있는 글귀에 눈길이 머무른다.
“Buen pan excelente agua y vino, carne y pescado. llena de toda felicidad”
“좋은 빵, 훌륭한 물과 와인, 고기, 생선. 모든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쇠를 녹여서 여러 가지 장신구와 공예품을 만드는 아예기의 작은 대장간.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행복은 참으로 소소한 것에 있음을 알려 주는 말이다. 순례길을 끝낸 후에도 이 말이 내 가슴에 그대로 남아 있길. 매일 매일 나는 오로지 걷는 일에만 전념하고 내 안에 있던 많은 바람과 걱정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고 행복은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간다.
에스테야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성당이 산토 세풀크로 성당. ‘성 무덤’ 성당이다. 규모도 크지만 성당의 문 위 조각이 예술이다. 12사도와 문 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군사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새겨져 있다. 문의 왼편에는 산티아고 상, 오른편에는 성 마르틴 상이 있다.
슈퍼마켓에서 선크림과 황도복숭아, 천도복숭아를 샀다. 황도는 입에서 살살 녹는다. 옆에 있던 아드리안이 부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어 복숭아를 그에게 내민다. 에스테야를 벗어나려는데 체리 나무에 가지가 휘청거릴 만큼 체리가 많이 달려 있다. 모세에게 ‘저거 먹고 싶다’고 눈빛을 보냈더니 고개를 끄떡인다. 발그스레하게 잘 익은 체리를 열심히 땄다. 지나가는 동네 주민들이 체리를 따는 우리들을 보고 웃기만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참 많은 과일을 길가에서 줍기도 하고 따기도 했다. 산티아고 북쪽 순례길에서는 거의 매일 밤을 주워서 간식으로 먹었다. 달고 맛있는 체리를 배낭 앞주머니도 모자라서 작은 비닐팩에 가득 담았다. 오늘 간식은 체리! 걸어가면서 아드리안도 주고 크리스토프에게도 나누어 주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모두들 너무 맛있게 먹는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순례길이다.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쑥쑥 받고 자라는 포도넝쿨들이 줄을 지어 있는 이라체 보데가의 포도밭.
순례자들을 위한 생명수
이라체Irache 와이너리로 우회하는 길로 들어섰다. 와이너리로 향하던 길에 잠시 들를 곳이 있다며 모세가 안내했다. 아예기Ayegui의 작은 대장간. 쇠를 녹여서 여러 가지 장신구와 공예품을 만드는 곳이다. 작년에 왔었던 모세를 주인이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준다. 그 많은 순례객들 중에서 모세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모세를 기억하지 못할 순 없겠지! 커피도 대접받고 만들어 놓은 제품 구경도 하고 화장실까지 이용했다. 모세는 목걸이를 하나 구입했다. 작은 인연도 기억하고 있는 모세와 함께 동행하는 길은 더욱 의미가 짙어진다.
아예기를 지나니 보데가와 포도밭이 모습을 드러냈다.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쑥쑥 받고 자라는 포도넝쿨들이 줄을 지어 있다. 들판에서도 포도주향이 느껴진다.
에스테야에서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로 오르는 코스에 있는 이라체 보데가Wine Fountain at Bodegas Irache에는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와인통이 있다. 왼쪽은 와인이, 오른쪽은 물이 수도꼭지를 틀면 콸콸 쏟아진다. 무료 와인이 콸콸 쏟아지다니?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데 내 앞의 수도꼭지에서 정말로 쏟아지고 있다. 순례자들을 위한 생명수이다. 생명수가 나오는 수도꼭지 바로 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이라체 보데가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무료로 제공하는 와인통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드리안과 모세.
“순례자들이어! 힘과 활력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다면 이 훌륭한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행복을 위해 건배!”
1891년부터 130여 년간을 하루에 100리터의 포도주를 오전 8시부터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수도꼭지를 돌리니 포도주가 콸콸 쏟아진다. 아드리안은 물병에 와인을 가득 담았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물병에 와인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담아가면 커다란 와인통도 금세 바닥이 날 텐데. 오후 늦게 도착하는 순례객들은 와인을 맛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다. 이라체 보데가의 와인을 마셔야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포도밭을 지나면서부터는 그냥 들길이다. 삼각형 산만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배도 고파지는데 마땅히 카페나 바도 없다. 아직 5km 정도 남았다고 한다. 왜 이리 길게 느껴질까? 햇살이 너무 뜨겁다. 5월인데도 벌써 한여름을 느끼게 해주는 날씨이다. 더우니 걷는 것도 더 힘들다. 너무 무료해서 아는 노래는 몽땅 불렀다. 갈증도 허기도 점점 심해진다. 나는 일희일비하는 순례자이다.
산꼭대기가 뾰족한 삼각형 산은 멀리서 보고 예쁘다 생각하고 사진으로 남겼는데 어느덧 내 곁에 와있다. 뾰족한 작은 삼각형 산 위에 몬하르딘Monjardin성이 있다. 9세기에 지어진 몬하르딘성은 가까이서 보니 꽤 규모가 크다. 성 위에 서면 어떤 풍광이 펼쳐질지 궁금하지만 우린 그 성을 돌아서 걸었다. 2km 정도 더 걸어서 오늘 목적지인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Villamayor de Monjardin에 도착했다. 마지막 언덕길을 돌아올 때는 탈진한 느낌이다.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모두 힘들다고 이구동성으로 탄식을 한다. 같이 힘드니 나의 피로가 확 줄어든다. 이건 또 뭔 심사일까?
에스테야로 향하는 길에 만난 긴 터널. 터널을 통과하는 빛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리조토
오늘 저녁은 특별히 크리스토프가 리조토를 만든단다. 모세는 그의 리조토가 세계 최고라고 말한다. 알베르게 옆 식품점에서 각종 재료를 사서 모두 함께 준비를 한다. 솔직히 나는 마늘과 양파만 깔 뿐 할 수 있는 건 없다. 맛있게 먹어주어야 하는데 리조토는 만들어 먹은 적도 없고 그리 좋아하지도 않아서 슬쩍 신경이 쓰인다.
하루에 30km 가까이 걷고 누군가를 위해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즐겁게 저녁을 준비한 크리스토프에게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고 식탁에 앉는다.
그런데 크리스토프가 만든 리조토를 한 숟갈 먹는 순간,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리조토와는 완전히 다르다. 리조토에 대한 나의 생각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최고! 한 그릇도 많다고 해놓고선 리필까지 요청했다. 리조토가 만들기 쉬운 음식처럼 보이지만 맛있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크리스토프 덕분에 또 하나의 추억이 곱게 저장되었고 좋아하는 음식이 새로 생겼다.
시라우키로 향하는 길의 포도밭에서 자라고 있는 포도넝쿨은 이제 포도가 맺히기 시작한다.
매일의 일상이 모여 추억이 되어간다. 별 것 아닌 일들도 산티아고 순례길이란 갈피 안에 들어서니 아주 근사한 스토리가 된다. 이 길을 걷는 이유이기도 하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과 “부엔 카미노(좋은 순례길 되세요)”라는 인사를 나누며 걷기만 하는 일상으로 마음은 차분해지고 내면의 소리뿐 아니라 자연의 소리에 더욱 귀를 쫑긋하며 걷는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내려놔야 하는지에 대한 고질적은 질문은 잊은 지 오래다. 밀밭과 포도밭, 자갈길을 넘나들며 걸으며 내 다리는 더욱 튼튼해지고 내 생각은 더욱 견고해진다.
황금빛의 새벽 여명이 시라우키를 감싸고 있다.

월간산 2022년 6월호 기사입니다.

양귀비가 가득한 초원과 바위산이 이색적인 풍경을 보여 주는 비야투에르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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