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왕인 나라 상상해 보셨나요

김남중 2022. 6. 3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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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여자들의 왕
정보라 지음
아작, 280쪽, 1만6800원
판타지 형식의 여성주의 작품들을 묶은 소설집 ‘여자들의 왕’을 출간한 정보라 작가.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의 새 소설집이 올 여름 소설 시장에서 어떤 바람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아작 제공


‘저주토끼’로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46) 작가가 새 소설집을 냈다. ‘저주토끼’가 호러 작품 위주였다면 이번에 나온 ‘여자들의 왕’은 판타지 장르의 여성주의 소설들이라 할 수 있다.

앞에 차례로 실린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세 편은 연작이다. 공주가 사나운 용이 지키는 높은 탑 속에 갇히고 기사와 왕자가 구출하러 온다는 이야기다. 익숙한 구도인데 시작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자신을 구하러 먼 길을 달려온 기사에게 공주가 하는 말. “뭐야, 너? 여기까지 왜 또 왔어?”

‘사막의 빛’은 가난한 소녀가 이슬람 상인들에게 팔려 긴 여행을 하고 술탄의 시종이 되는 이야기다. 소녀의 눈물겨운 고생담으로 점철되는가 싶었는데, 뜻밖에도 이 여정은 매우 신비롭고 아름답게 전개된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사람들 속에서 소녀는 보호를 받고 성장한다. 악인도 없고 잔혹함도 없다.


표제작인 ‘여성들의 왕’은 여성이 왕인 나라에서 벌어지는 여자들의 권력 투쟁을 그린다. 죽고 죽이는 여성 권력자들, 아름다움으로 남자들을 굴복시키는 영리한 여성들이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남자들은 사극 속 중전이나 궁녀처럼 보조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새 소설집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드는 정보라 작법의 비밀을 드러내 보인다. 정보라는 오래되고 익숙한 이야기를 비틀어 낯설고 현대적인 이야기로 만든다. 주인공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고, 마법과 환상을 끌어들이고, 선과 악을 섞어버리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간다. 용에게 납치된 공주는 적극적으로 현실을 탈출한 여성이 되고, 이교도의 잔혹 동화는 소녀의 성장 동화가 된다.

정보라는 이런 식의 전개를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능청스럽게 해낸다. 장르적 수법을 통해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고, 필요하다면 어느 곳에든 작가가 끼어든다. SF 작가이자 편집자인 최지혜는 지난달 인터뷰에서 정보라에 대해 “자기가 겪고 느끼고 좋아하는 이야기라면 뭐든지 다 소설로 써내는 능력이 있었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다.

정보라는 소위 ‘문학적’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폼을 잡지 않고 툭툭 이야기를 펼친다. 추상성이 높은 단어, 밀도 높은 문장 등을 쓰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대신 그의 소설엔 놀라움과 즐거움이 있다.

‘높은 탑에 공주와’에서 탑에 갇힌 공주는 “이제 네가 왔던 세계로 돌아가야지”라고 권하는 용에게 “조금만 더, 있다가”라고 답한다. “잠시만 더, 이대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은 채, 지금처럼 이 높은 탑의 창턱에 상처 입은 손을 감싸 쥔 채 혼자 앉아서, 잠시만 더. 마음이 다시 한번 어딘가를, 누군가를 원할 때까지. 다시 삶을 살고 싶어질 때까지.”

이런 공주의 모습은 그동안 본 적이 없다. 정보라의 소설은 다른 세계를 묘사하며 독자들에게 사고실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사변소설로 불릴 수 있다.

정보라의 소설은 속도감 있게 읽히는데 다 읽고 나면 눈물에 젖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꼭 쥔 여성의 이미지가 남는다. 그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 서사를 바꾸기 위해 장르를 사용한다.

정보라는 작가의 말에서 “여성 주인공을 인간이 아니도록 바꾸어서 권력을 주었다”며 “여성이 귀신이나 괴물이 되어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수록된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 대해서도 “동슬라브 ‘원초연대기’에는 유일한 여성 군사령관 올가 공주가 등장한다”며 “올가 공주가 유일하고도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 군사 지휘관이며 이후 동슬라브 중세 역사에 이런 진취적인 여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게 슬퍼서 내 상상 속에서라도 올가 공주의 대를 이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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