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경제력 확대가 핵심".. '여돕여' 부스터 GSW가 남긴 것 [정지혜의 빨간약]

정지혜 입력 2022. 6. 30. 21:53 수정 2022. 7. 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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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세계여성지도자회의(GSW) 참가기
여성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 필요성 실감
생생한 성공 사례 보며 자극받아
'여적여'는 옛말..'여돕여'의 시대 활짝

‘이 좁은 한국 땅에서도 만만찮은데, 정말 세계 무대에서 무언가 할 수 있을까.’

일하는 여성으로서 나름대로 자신감 갖고 고군분투 하며 살아왔지만 그래도 내면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가 한계이지 않을까’, ‘지금보다 더 나아갈 길이 있을까’와 같은 막연한 생각에 때때로 사로잡혔다. 열심히 기회를 모색하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불확실성을 즐기거나 새로운 기회로 확장할 만한 상상력은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지난 23일(현지시간)부터 25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22 세계여성지도자회의(Global Summit of Women)’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성주재단이 인솔하는 한국대표단에 취재진으로 합류하면서다. GSW는 매년 전 세계 수십개 나라에서 정·재계 여성 리더 1000여명이 참석해 ‘여성계 다보스포럼’이라 불리는 행사다. 이 정도 규모의 국제 컨퍼런스 참여는 처음이라 어떤 것을 마주할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출국했다.
GSW 참가자들이 함께 조찬을 하며 네트워킹을 하고 있다. GSW 제공
무엇보다 연사와 참가자 대부분이 여성 최고경영자(CEO)이거나 간부급 기업인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컸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것으로 여겨지기 힘들었던 ‘경제적 영향력’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장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참석해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스스로 크고 작은 기업 및 브랜드를 일으켜 운영하는 여성들과 교류하고, 여성리더십의 힘으로 성공한 이들의 사례를 눈앞에서 접하는 것의 효과. 국제 무대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많은 여성들이 즉각적으로 영감을 받는 모습을 확인했다. 새로운 도전에 대해 막연했던 불안은 그 공기 속에서 ‘손에 잡히는 미래’로 한 단계 올라갔다. 

개회사에서부터 아이린 나티비다드 GSW 회장은 “나는 늘 여성이 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GSW를 기획해 올해로 32년간 이끌고 있는 나티비다드 회장은 이 행사가 문제제기를 넘어 ‘해결책’을 찾는 곳이라고 매번 언급한다. 여성 앞에 더욱 가혹한 현실을 여성들이 제 손으로 헤쳐나갈 실용적 방안을 고민한다는 차원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이는 문제 해결에 두 팔 걷어붙이지 못하는 많은 여성들을 ‘나약하다’며 깎아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대변혁의 시대, 여전한 위기 속에서 여성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가속화하려면 자질 있는 여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장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GSW와 같은 행사는 이를 조금이라도 꿈꾸는 예비 여성 리더들에게 부스터를 달아준다. 세계 경제, 정치, 비영리기구에서 이들 여성이 더 많은 지배력을 행사함으로써 모든 여성은 물론 사회 전체에 더 많은 이득이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GSW 컨퍼런스를 32회째 이끌고 있는 아이린 나티비다드 GSW 회장. 행사 내내 진행자, 모더레이터로 등장해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GSW 제공
전 세계적으로 성별 임금격차나 각종 여성 차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성이 너무 강해서 문제’라고 엄살을 떨거나 ‘여성이 남성을 압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고루한 말로 억누르려 든다. 언제는 남성을 이기려 해서 문제라더니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은 원래 나약하고 의존적’이라고 폄하하는 모순도 보인다.

가부장적 시스템이 강고한 나라일수록 여성들은 이런 사회적 가스라이팅을 나도 모르게 내면화하게 된다. 나의 실제 역량과 별개로 기준을 남성에 둔 채 그들보다 더 강해지는 자신을 은연 중에 경계하기에 이른다. 영향력 있는 여성은 너무 쉽게 마녀사냥을 당하며, 그에 비해 기존 질서 속 ‘적당한 안온함’에 머무르는 여성은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회가 아닌가. 이런 분위기에서 도전보다 도피를 택하는 일은 훨씬 쉽다.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아 온 힘 다해 도전하고 성취하는 여성을 이 사회는 과연 가만히 둘 것인가. 그 두려움에 짓눌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고 숨는 여성을 무작정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힘든 일을 해야 모든 여성이 설 땅을 넓힐 수 있다. 적어도 같은 여성들은 이를 지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GSW 첫 날인 지난 23일(현지시간) 환영 만찬이 진행되기 전 태국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교류하는 시간, 태국 인형 공연 극단과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지혜 기자
그런 여성 리더를 늘리려면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저 밖에 더 넓은 세상과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필수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절대 전부가 아니다. 세계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GSW의 메인 후원사인 MCM, 성주그룹의 김성주 회장은 “여성의 역량을 무너뜨리기에 바쁜 좁은 한국 땅에서 벗어나 세계로 시야를 넓히라”고 거듭 당부했다. 꼭 타국으로 물리적 이동을 하지 않더라도 내 능력을 글로벌 무대에서 활용할 방안을 경계 없이 고민하는 일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김 회장은 지난 25일 GSW 갈라 디너 연설에서 “제발 우리(GSW)를 활용해달라”고 말했다. MCM이 매번 이 행사를 후원하는 것은 브랜드 홍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도약을 꿈꾸는 각국의 여성들과 연결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1998년 GSW에 처음 연사로 초청받은 김 회장은 당시 만난 세계 여성 리더들에게 엄청난 감명과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김 회장은 “전통적 결혼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연이 끊어지는 나라인 한국은 내게 너무 작은 땅이었다”며 “그렇게 세계로 눈을 돌려 MCM을 인수했고, GSW를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업에 도움을 줄 여성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일본에서 온 아코 스즈키씨는 2014년 처음 GSW에 참석해 만든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기업 상담·강연·SNS 관리 대행 등을 하는 회사(AriNa)를 창업해 운영 중이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매년 GSW에 와 새로운 사업 인연과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스즈키씨뿐 아니라 네트워크 조찬, 오찬 등을 통해 만난 많은 이들이 이러한 이유로 여러번 GSW를 찾고 있었다.

이를 비롯해 이번 GSW에서는 젊은 나이에 글로벌 창업에 성공한 CEO들의 이야기, 버려지는 못생긴 바나나를 사업적으로 활용하는 스타트업 등 다양한 역발상 사례, 노점상과의 상생을 ESG 관점으로 풀어내 수익 극대화에 성공한 태국 최대 쇼핑몰 개발업체 씨암피왓 대표이사 등 생생한 여성 기업인의 성공 스토리가 쏟아졌다. 한 마디로 시야가 트이는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만 눈을 넓히면 이토록 거대한 기회의 장이 있고, 내 또래의 여성들 역시 활발히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극을 받았다.

명함 하나를 교환하면서도 느끼고 배우는 것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글로벌 네트워크를 염두에 둔 채 국제적 소통이 가능한 연락망을 구축해 놓았고, 명함 뒷면에 사업 소개를 적어 자신을 알리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직함을 영어로 번역했을뿐인 기본 명함만 내밀었고, 나의 다양한 활동을 홍보할 어떤 문구나 채널도 준비되지 않은 채였다. 다음 번 참석 기회가 또 있다면 아마 좀 더 대비를 해서 갈 것이다. 더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러한 컨퍼런스를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생각하게 된 계기다.
태국 방콕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2 GSW 컨퍼런스에서 한 참가자가 발표자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GSW 제공
여성리더십 포럼의 단골 주제인 ‘여성할당제’ 관련해서도 느끼는 바가 많았다. 세계 200대 기업의 이사회 성비는 2022년 1월 현재 남성이 79.8%, 여성이 20.2%로 여전히 매우 불균형적이다. 지난 약 20년간 유럽과 미국이 30%를 넘는 여성 이사를 구성할 동안 아시아는 겨우 10%를 넘겼다. 특히 2004년 그래프에서 한국의 여성 이사 비율이 0%라고 나온 대목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성할당제가 마치 남성 역차별의 대표 사례인 양 빈번하게 소환되는 실정이다. 한국이 얼마나 세계 기준에서 뒤쳐져 있는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무의미한 젠더 갈라치기 논의로 사회적 비용을 낭비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 아일랜드 참가자가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성 평등한 나라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성별 격차가 있다. 여기서 더 논의를 끌어올리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질문한 데서는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여성 이사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더 높이려면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고, 가장 낮은 곳은 ‘남성 역차별이니 폐지하라’고 하는 아이러니. 이렇게나 다른 문제제기의 수준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통계적으로 여성할당제를 법으로 규정하는 국가는 여성 이사 비율 38.5%, 법이 없는 국가는 22.0%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발표를 맡은 나티비다드 회장은 “변화는 압력(pressure) 없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며 “할당제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성평등 이사회 구성을 위해 노력하느냐의 문제”라고 밝혔다. 여성 이사진을 늘리려는 실질적 행동이 이루어진 스웨덴 같은 나라는 법 없이도 그 목표를 거의 달성했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 나라는 할당제라도 만들어 놓는 것이 최소한의 조치다. 나티비다드 회장은 “할당제가 있든 없든 이사회 성비 목표수치를 데드라인까지 달성하도록 밀어붙여야 한다”며 “그것을 하지 않는 성평등 운운은 ‘소망(wish)’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GSW 여성 롤모델과의 멘토링 세션을 마친 후 MCM 김성주 회장과 세계 각국에서 온 여성 기업인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성주재단 제공
“MCM은 성평등 관점에서 여성을 매우 많이 채용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성 직원들이 ‘파워풀한 여성이 너무 많다’고 호소하는 것이 재미있죠.”

이번 행사를 통해 직접 만나 본 김 회장은 여성의 강점을 매우 잘 알고 활용하는 인물이었다. MCM은 현재 여성 65% 남성 35% 성비와 임원 성비 5대 5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쓴 자서전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이고 싶다’에서도 창업 초기 성주인터내셔널 당시 전 직원 400명 중 300명이 여성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이 지금 시대에 리더로 더 활약해야 하는 이유로 김 회장은 “다문화, 다인종 등 다양성을 더 잘 포용해 경쟁력을 빠르게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며 “직감적인 힘이 강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훨씬 잘 받아들인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에서 디지털 역량을 갖춰 세계 무대에서 무한한 역량을 발휘하라는 주문이다. 

성 불평등과 차별적 대우, 전쟁, 코로나19, 인플레이션 등 남성이 만든 지금의 세상은 여러모로 망가져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여기에 불평불만하는 것이 ‘사치’라는 그의 발언은 오히려 여성의 강인함과 잠재력을 확신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여성은 불평만 하고 해 달라고만 한다’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다. (사실 이는 국제 행사에서 언급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수준의 발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본질은? 이미 충분한 역량을 스스로 사장시키거나 포기하지 말고 마음껏 발휘하라는, 남성 사회가 원하는 수동적 여성상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는 애정 어린 쓴소리다. “지금껏 남성이 망친 세상을 이제는 여성들이 구하자”는 연설 마지막 문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자다)’ 프레임은 이렇게 또 한번 허상으로 드러났다. 여적여는커녕 ‘여돕여(여성을 돕는 건 여성)’ 이름표를 붙여 마땅한 조언이 아닌가!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방콕=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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