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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헤게모니에 눈멀지 않는 자가 새로운 헤게모니를 만든다[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박주용 교수 입력 2022. 06. 3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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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미래는 진중하고 온유한 자들이 물려받을지니
미국 영화감독 우디 앨런(왼쪽 사진)은 나폴레옹 전쟁기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1975년작 <사랑과 죽음>에서 왜소하고 소심한 평화주의 일상철학자 보리스로 분한다. 나폴레옹 암살 실패로 처형당한 뒤 저승사자와 길을 떠나는 보리스의 입을 빌려 사람의 마음과 몸, 죽음과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전하며 새로운 영화의 시대를 예고한다(오른쪽). 경향신문 자료사진
우디 앨런 영화 ‘사랑과 죽음’ 속
소심한 ‘평화주의 철학자’ 주인공
혁명정신과 민족주의가 휩쓸던
나폴레옹 전쟁기 ‘진짜 영웅’ 제시
선동하는 자 아닌 온유한 자의 승리

한국에서 제작한 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지금 현실의 씨앗은 한국 청년들이 문화 창작의 자유가 넓고 역사가 더 긴 외국의 수준 높은 영화들에 탐닉하던 1990년대에 뿌려졌다고 볼 수 있다. 문화 개방을 통해 물 밀듯 들어오기 시작한 정식판이든, 여전히 금지된 해적판(부트렉·bootleg)이든 예술 영화, 독립 영화 할 것 없이 대학가에 퍼져나가던 영화 보기 열병에 필자도 걸려 한참 빠져 있던 그 시절에 알게 된 감독 가운데 우디 앨런(Woody Allen·1935~)이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도 꽤나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식 스탠드 업 코미디계를 가히 세계 최강이라고 해도 될 말재주로 휩쓸기도 했던 앨런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로마 위드 러브>(To Rome With Love)로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사랑받기 전 이미 수십년의 커리어틀 통해 독특한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왔다. 영화관들은 엄청난 자본력으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들과 그 속편의 속편의 속편에 지배당하고, 스마트폰 화면들은 생각할 틈 없이 짧은 ‘쇼츠’로 채워지는 지금 세상에 그와 같은 ‘작가’가 그리울 때가 있다.

앨런의 영화라면 어디라도 달려가서 보던 나에게 제일 기억에 남는 영화로는 <사랑과 죽음>(Love and Death)이라는 1975년 작품을 꼽을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기라는 무거운 시대를 배경으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등이 이룩한 러시아 문학을 기막히게 웃기도록 풍자하면서 우디 앨런의 영화 세계의 전환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시작에서 우디 앨런이 분한 ‘보리스’라는 왜소한 평화주의 일상철학자(이런 역할에 앨런보다 더 잘 맞을 사람이 있는지?)의 세계관은 다음 대사에 담겨져 있다.

“자연이란 말이지 … 거미는 벌레 잡아먹고,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 잡아먹고, 식물이 식물 잡아먹고 동물이 … 내 관점에서 자연이란 그저 거대한 식당이라고.”

난 왜 온 유럽을 들끓게 했던 나폴레옹 시대의 혁명정신과 민족주의 열정에 휩쓸리지 않는, 가진 것이라곤 달변 하나인 유약한 시골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국제 질서를 논할 때 ‘헤게모니(hegemony)’라는 말을 자주 쓴다. 특정 국가가 갖고 있는 선도적·우세적 지위를 뜻하는 이 단어는 ‘우두머리’라는 희랍어 ‘헤게몬’에서 나왔으며, 헤게몬은 고대 그리스 시기에 다른 도시국가를 압도하는 강력한 도시국가를 일컬었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 왕국,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한 로마 제국, 근대 이후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대영제국 등이 세계를 제패했다가 사라져간 역사 속 헤게몬들이다.

그러나 헤게모니는 서양 주도의 국제 질서라는 하나의 장에서만 찾아지는 게 아니다.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이 차례대로 차지한 중대륙의 헤게모니,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이 차지했던 한반도의 헤게모니 등 그것은 인간 집단이 사는 곳이라면 거의 어디든 존재한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1891~1937)라는 마르크시스트 사상가가 ‘문화적 헤게모니(cultural hegemony)’라는 개념을 주창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 지배계층(이 말에서 벌써 마르크시즘의 향취가 물씬 난다)이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현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세계관(사회규범이나 ‘상식’의 정신적 기반)을 다른 계층에도 전파시키려 함을 말한다. 이 개념을 통해 그람시는 헤게모니가 사회 규범의 세계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였다.

이 지면이 한때 필자도 유행 따라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고 부르던 계층의 문화적 헤게모니의 실체와 그 전파 기제에 대한 그람시의 이론을 토론하는 자리는 아니겠지만, 사람들의 행동 데이터를 분석하는 현대 네트워크 과학과 인간동력학(human dynamics)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선택을 끊임없이 모방하고 그것들을 매우 규칙적으로 따라하면서 살고 있으므로 문화적 헤게모니의 존재는 그럴듯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 일상의 상당 부분은 ‘남 따라하기’ ‘갔던 데 또 가기’ 등 문화적 헤게모니를 추종하고 그에 순응하여 사는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사회를 이루고 있는 여러 집단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 가운데에서 힘이 있고 잘사는 사람들의 것에 끌리고 그것을 따라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면 또한 그 ‘우월한’ 세계관을 믿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세계관은 더욱 더 도드라져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욱 더 빠른 속력으로 증가하는 일이 생겨날 수 있다. 네트워크 과학에서는 이것을 ‘누적되는 이점(cumulative advantage)’이라고 부르는데, ‘헤게모니가 강력하니까 따라하고, 따라하니까 더 강력해지는’ 과정이 순환하면서 시간이 감과 동시에 그 헤게모니가 더욱 더 압도적으로 고착화되고, 그에 대한 대안이나 새로운 규범의 출현이 정말로 요원한 일처럼 보이는 문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빅데이터에서 AI, 메타버스로
남이 만들어낸 헤게모니 편승해
‘가짜 전문가’들이 목소리 높여

강력한 헤게모니의 고착화에 따라 그에 기꺼이 순응만 하는 예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상 속에서는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몸에 걸치고 싶어하고, 똑같은 곳에 살려 하면서 소수의 특정 브랜드 제품이나 특정 주거지역에 대한 수요가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올라가는 현상을 들 수 있다. 또 지난 10년 남짓 학계에서는 자칭 ‘빅데이터’ 전문가로 시작해 ‘AI(인공지능)’ 전문가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메타버스’ 전문가로 시류에 딱딱 맞춰 번개처럼 탈바꿈하면서 외국에서 만든 유행어를 자기들의 핵심 연구 키워드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세태를 흔히 볼 수 있는데, 잘나가는 남이 만들어낸 헤게모니에 편승하는 것이 그만큼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학문은 하루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진대 그 지난한 탐구 과정을 직접 겪은 근본 있는 진짜 전문가인지, 남이 한 것을 긁어모아 기워낸 거적을 진품인 척 입고나서 사람들의 주목만을 원하는 가짜 전문가인지 보는 눈이 없고서는 감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필자가 연구하고 싶은 ‘문화의 물리학’에서 고민하는 큰 주제가 이러한 헤게모니의 발생과 소멸의 메커니즘이다. 우리 일상을 들여다보면 지금 당장 다수의 정신이나 선택을 지배하는 헤게모니가 분명히 존재하고 또 그것에 압도당해 그 밖에 다른 것이 과연 존재할 수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때의 헤게모니가 스르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등장해 사람들의 선택을 받고 새로운 헤게모니로 자리잡는 현상이 반복돼왔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경험이다. 위에 열거했던 역사적 강국들, 인상파·추상파·야수파 같은 이름의 미술사조, 바로크·고전파·낭만파 같은 이름의 음악사조들의 등장과 쇠퇴가 바로 그 증거이다.

이런 역사에서 보듯이 바로 지금의 헤게모니에 우리 사고를 지배당함으로써 새로운 미래가 필연적으로 올 것이라는 믿음을 버린다면 그것은 눈을 뜬 장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 찰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현재라는 섬광에 눈이 멀지 않고 미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지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현재 헤게모니에 휩쓸리지 않고
진중하게 미래를 설계하는 이들
지금은 눈에 띄지 않고 약하지만
사색·관조로 새 시대 끌어올 것

무엇보다 그들은 아직 지금의 세상을 지배하는 헤게모니의 요란한 소리와 힘자랑에 묻혀 목소리가 우리에게 들리지 않고, 그들의 진정한 힘을 감지할 수 없는, 조용히 숨어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미래를 설익은 상태에서 섣불리 남들 앞에 내세웠다가 지금의 헤게모니에 치여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는 진중한 사람들이다. 실력 없이 남의 것을 탐하여 지금의 헤게모니에 편승하여 한순간의 쾌락을 좇는 그런 기회주의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조용히 진중하게 미래를 설계하는 그들은 그래서,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 약하고 작은 존재처럼 보이지만 언젠간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평화를 즐길 것이다.”(시편 37:11), “온유한 자들이 복이 있어 그들이 땅을 물려받으리라”(마태복음 5:5)가 말하는 그 온유한 자들이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사랑과 죽음>의 보리스에게로 돌아와보자. 혹시 나는, 미래에 온 땅을 물려받을 사람들의 특징인 ‘온유함과 진중함’의 전형에서도 한 끗 모잘라 보이는 ‘왜소하고 소심한’ 괴짜 보리스가 혹시 미래의 헤게몬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인가?

그렇다. 보리스는 바로 그러한 자신의 성격 덕분에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타인을 살리고 새 시대를 끌어오는 영웅이 된다. 자신과 달리 용맹하고 훤칠하고 잘생긴 강한 상대방과의 총대결에서도 자신의 신념인 평화주의를 지킴으로써 호전적이고 피를 갈구하는 상대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고, 가족을 위해 러시아를 침공해온 나폴레옹을 암살하려다가 평화와 철학에 대한 신념 때문에 실패하고 처형을 당한 뒤 저승사자와 길을 떠나기 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사랑과 죽음의 심오한 의미를 일깨워주게 된다(물론 우디 앨런 식으로 코믹하게 전해지지만).

“살면서 내가 얻은 교훈이 무언지 얘기해줄까? 사람은 마음과 몸 이렇게 두 가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확인한 거지. 시, 철학과 같은 모든 고귀한 소망을 품는 것은 마음이지만 온갖 재미를 다 보는 건 몸이라는 것도. 죽음을 두고 쓰라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봐. 신이라는 존재를 굳이 원망할 필요도 없고. 신에게는 ‘당신은 실력보다는 실적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는 험담은 해줄 수 있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사랑에 관해서는 말이지…. 사랑의 횟수는 중요하지 않아. 질이 더 중요하지. 그런데 만약에 한 달에 한 번 아래로 떨어지면 그때 가서 다시 한번 들여다볼게.”

자신을 닮은 왜소하고 소심했던 보리스의 입을 빌려 심오한 인생관을 관객들 뇌리에 박아넣은 앨런이 돌아와 다시 메가폰을 잡았을 때 그는 독보적인 깊이를 가진 ‘도시의 철학자’가 되어 새로운 영화의 헤게모니를 만들어냈다. 눈길만을 끌기 위한 폭력, 값싼 감정만을 북돋기 위한 선동 없이 사색과 관조로 가득한 진중하고 온유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세상을.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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