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싼 반찬 찾아 3만 보를 걸었다

손고운 기자 입력 2022. 7. 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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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빈곤층에 더 가혹한 인플레이션의 민낯.. 두 달치 가계부 살폈더니 굶고, 아프고, 외롭고
2022년 6월24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 임대아파트에 사는 김주현(62·가명)씨가 ‘노브랜드’ 라면과 밥, 김치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김씨는 “라면 맛은 다 비슷하니 제일 싼 걸 사면 된다”고 했다. 박승화 기자

2월18일: 생필품 가격이 많이 올라 사기가 무서움. 너무 힘드네요.

2월19일: 반찬 6팩에 2만원 했는데 3천원 오름. 식자재 마트도 대부분 1천∼2천원 오름.

3월5일: 생일이라 미역국은 먹네요. 마음이 참…흠.

-허리디스크 앓는 이지환(41·대구)씨 가계부

‘아침 안 먹음. 점심 미역국과 밥. 저녁 안 먹음.’

대구의 한 주택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이지환(41)씨가 2022년 3월5일 생일날 가계부에 쓴 식사 기록이다. 이씨는 평소 하루 한 끼만 챙겨 먹을 때가 많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무말랭이·김치 같은 밑반찬과 밥을 먹는다. 저녁은 또 굶거나 우유로 때운다.

건설노동자이던 이씨는 2019년 허리를 다친 뒤로 일을 못하게 됐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이 되어 생계급여(월 58만3444원)를 받아 불행 중 다행이지만, 그 돈마저 휴대전화 명의도용 사기를 당한 탓에 대출금을 갚고 통신비를 내느라 절반 이상 스르르 사라진다(표1 참조). 이씨가 어릴 때 폭행을 일삼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가족이 없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현장에 있다가 간신히 살아난 뒤에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까지 심해졌다.

생일 밥상이 점심 미역국 한 끼

2022년 6~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6%를 넘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물가가 치솟아도 이씨 같은 빈곤층도 ‘밥’은 먹고 산다. 하지만 밥만 먹고 산다. “깻잎 반찬 한 팩 사는 것도 망설이고”(이지환씨), “유통기한이 다 된 햄을 찾아 왕복 1시간씩 거리를 걷는다”(박희원씨). 최근 ‘런치플레이션’(점심·Lunch+물가상승·Inflation) 탓에 직장인들이 도시락을 싸오거나 편의점에서 식사를 때운다지만, 물가가 오르면 아예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도 있다. 인플레이션은 불평등하다. 빈곤층에 더 큰 타격을 미친다. 보고픈 사람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돈이 없어 “바쁘다”고 한다(한정구씨). 아프면 병원에 가지 않은 채 그냥 참고(정연지씨), 에어컨이 없어(25가구 중 12가구) 더우면 그냥 견딘다.

2022년 2월18일~4월19일 두 달간 빈곤사회연대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생계급여·주거급여 등을 받는 25가구를 대상으로 가계부 조사를 진행했다. 25가구가 매일 식단과 식사 방법, 자신의 감정 상태, 수입과 지출 내역 등을 꼼꼼하게 기록했다(표2 참조). 활동가들이 월 1회 이상 방문해 가계부 내용을 살피고 이들과 대화했다. <한겨레21>은 이 가계부 조사 결과를 모두 들여다보고, 가계부 조사에 직접 참여한 활동가들과 가계부 작성에 참여한 기초생활수급자 5명을 5~6월에 따로 직접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다음에 등장하는 기초생활수급자들의 사연은 인터뷰와 가계부에 직접 쓴 내용을 참고해 재구성했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딱 한 번의 고기, 4860원짜리 수입 삼겹살

4월4일: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치킨 1마리로 4명이 조금씩 나눠 먹었다. 한참 먹어야 하는 나이인데도 불평불만 가지지 않고 맛있게 먹어준 용이, 환이 고맙다.

4월12일: 우리 용이, 환이는 매일 치킨 먹는 게 소원이란다. 부족한 엄마라 미안하기만 하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나태해지지 말자.

-아픈 노모, 고등학생·중학생 두 아들과 사는 정연지(44·서울)씨 가계부

4인가구인 정연지씨 가족은 한 달 식비로 전체 소득(140만원)의 55%가량인 77만원을 쓴다. 치킨도 제대로 못 먹고 아껴쓰는데도 그렇다. 가계부 조사에 참여한 1인가구 22가구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하루 평균 식비가 8618원에 불과했다. 이들은 식료품비로 월 20만5186원, 외식비로 월 5만3370원을 썼다. 이마저도 평균치일 뿐이다. 소고기를 꼭 먹어야 하는 특정 질환 때문에 생계급여 대부분을 식비로 쓴 가구가 포함됐다. 두 달 동안 닭고기·소고기 등 육류를 한 번도 사지 않은 가구가 9가구, 생선 등 수산물을 한 번도 사지 않은 가구가 14가구였다. 과일을 한 번도 사지 않은 가구도 9가구나 됐다.(김준희 한국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 분석)

1인가구 생계급여 월 58만원 남짓 가운데, 관리비·전기요금·수도세·통신비 등을 제하고 나면 사실상 영양가 있는 식사가 불가능하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김주현(62)씨는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이 잦다.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은 국수다. 맹물에 채소나 멸치 없이 신김치 국물을 붓고, 면을 넣어 끓인다. 건더기 하나 없는 멀건 국수로 끼니를 때운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은 날엔 특별히 정육점에서 6천원 주고 산 돼지 앞다리살 300g을 구워 먹는다. 젊을 때 중식 요리사였던 그이지만, 재료가 비싸서 거의 요리하지 않는다. 다리에 경증 장애가 생겨 오래 서 있지 못하는 바람에 일을 그만뒀다. 그는 명의도용 사기를 당한 이후 생계급여와 장애수당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픈 이들에게 ‘밥 먹는 일’은 스트레스다. 호흡기질환과 당뇨를 앓는 천주오(63)씨는 2월27일 가계부에 김·멸치볶음·감자로 끼니를 때운 뒤 “이러다 영양실조 걸리겠다. 병원에서 빈혈이 있다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데.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라고 적었다. 장애와 욕창 때문에 의무적으로 고기를 먹어야 하는 연정아(40)씨는 “다른 걸 다 포기하고 식비에 몰아 쓴다. 오로지 욕창 때문에 단백질을 먹는 게 목적인데 한 끼에 (고기) 세 점, 네 점씩 먹는다”고 말했다.

2022년 6월24일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사는 김주현(62·가명)씨 집 천장 벽지가 찢어져 있다. 벽에 못질할 수 없어 벽에 달린 물건은 모두 테이프로 붙였다. 박승화 기자

유통기한 다 된 햄, 헌 옷, 라면…

물가가 치솟으니, 이들은 식비를 아끼려 더 많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월 식비로 10만3천원을 쓴 이지환씨는 “네 팩에 1만원 하던 반찬도 2만원이 됐다. 사람이 김치만 먹고 살 수 없는데, 반찬 사기가 너무 힘들다. 반찬이나 생필품을 살 때 여러 군데를 다 돌아다니면서 가장 싼 곳을 찾아다닌다. 하루는 3만 보를 걸은 날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두 달 동안 4860원짜리 수입 삼겹살을 딱 한 번만 사 먹을 정도로 식비를 아꼈지만, 수입(월 78만원)이 지출(월 92만원)보다 적어 가계부는 ‘마이너스’였다(표1 참조).

박희원(44)씨도 희귀난치성 질환인 모야모야병으로 심하게 몸이 떨리는 상황이지만 차비가 걱정돼 집에서 왕복 1시간 넘게 걸리는 서울 동묘시장까지 걸어간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 싸게 처분하는 햄 따위를 사기 위해서다. 햄은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아껴 먹는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은 동묘시장의 단골손님이다. 헌 옷, 헌 신발,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과 화장품 등을 살 수 있어서다. 가계부 조사 결과를 보면, 돈을 아끼려 ‘도심 한구석에 쑥이 자라는 위치를 봐뒀다가 캐 먹는다’ ‘시장에서 못난이 채소 등 상품성 없는 식자재만 파는 가게를 기록해놓는다’ ‘복지관에서 주는 국 1인분에 채소를 넣어 몇 끼니로 나눠 먹는다’ 등 식비를 아끼려는 온갖 방법이 등장한다.

25가구 가운데 60살 이상 노인가구(12가구)가 많긴 했지만, 30~40대 가구(9가구)의 밥상이라고 상차림이 더 나은 것은 아니었다. 김민환(36)씨는 위장병, 안질환, 뇌전증, 정신질환 등으로 요리가 힘들어 두 달 동안 78회 식사를 걸렀다. 하루에 세끼를 먹는다 치면 180회 식사했어야 하는데, 절반 가까이를 건너뛴 셈이다. 그나마도 라면을 먹은 횟수만 60회나 됐다. 손떨림이 심해 칼을 쓰지 못하는 40대 박희원씨, 우울증 탓에 집에 칼을 두지 않는 40대 이지환씨는 노동이 불가능할 만큼의 건강상태 때문에 수급자가 됐지만 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근 주민센터나 복지관의 ‘반찬 나눔’ 대상이 되지 못했다.

*2부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229.html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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