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자리도 아닌 9급 [슬기로운 기자생활]

서혜미 2022. 7. 2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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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청년진보당 관계자들이 21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통령실의 별정직 공무원 사적채용과 특혜채용 논란을 비판하는 내용의 행위극을 하고 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직접 사과와 채용자 전수조사를 촉구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슬기로운 기자생활] 서혜미 | 이슈팀 기자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재학 중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따지자면 3년이다. 변변한 벌이가 없던 터라 집에서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을 찾는 날이 많았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날에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계란으로 저녁을 때우곤 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된 지금은 하루에도 몇번씩 프랜차이즈 카페에 가는 게 가능하지만, 그때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학교 안 카페도 어쩌다 한번씩 갔다. 택시를 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봄가을엔 운동 겸 학교에서 집까지 약 40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가끔 아무렇지 않게 택시를 타는 지금이 생경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궁상맞던 취업준비 기간을 떠올렸던 이유는 최근 불거진 대통령실 ‘사적 채용’ 논란에서 나온 해명 때문이었다. 윤석열 대통령 지인인 강릉시 선거관리위원의 아들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 9급 행정요원으로 채용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자신이 추천한 인사라며 이렇게 해명했다. “높은 자리도 아니고 행정요원 9급으로 들어갔는데 뭘 그걸 가지고”, “(9급은)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는다. 한 10만원. 최저임금 받고 서울에서 어떻게 사냐, 강릉 촌놈이.”

그 말에 함께 취업준비생 시절을 보냈던 이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영·경제학 등을 복수전공하지 않은 문과생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다. 나를 비롯해 주변 언론사 취준생들은 미련하게도 사기업에 낼 만한 ‘스펙’을 쌓지 않았기에, 진로를 돌린다면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아마 나도 3년 전 <한겨레>에 입사하지 못했다면 부모님의 압박 속에 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생)이 됐을지 모른다. 언론사가 뽑는 신입기자 수는 대부분 한자릿수로 줄어든 지 오래고, 당장 일할 수 있는 경력기자 채용을 늘리는 추세라 신입 공채를 건너뛰는 해도 있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 중에서도 가능성이 적은 언론사 대신 공무원 쪽으로 갈아탄 이가 있었다. 그들은 ‘높은 자리도 아닌’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는’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1∼2년 동안 돈과 시간을 짜내고, 많은 것들을 유예하면서 책상에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 건강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생겼다.

해마다 왜 수만명이 9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지, 왜 자신의 발언이 비판받는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1차 노동시장, 낮은 고용안정성과 저임금 등 열악한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뉜 이중구조는 우리 사회 오랜 문제 중 하나다. 청년기에 어느 시장에 진입하는지가 앞으로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차 노동시장에서 일을 시작할 경우, 숙련도가 쌓여도 1차 노동시장으로 이동하기보다 2차 노동시장을 전전할 가능성이 크다. 양쪽 간 지나치게 큰 격차가 진입장벽으로 작용해 벌어지는 일이다. 동시에 이 구조는 많은 청년이 최저임금보다 10만원 더 받는 박봉이더라도, 안정적 일자리인 공무원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인이 당장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태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나는 운이 좋았다.

논란이 지속되자 권 원내대표는 20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송구하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별정직 공무원과 일반직 공무원의 차이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해명처럼 별정직 공무원은 선거 기간 헌신한 이들이 채용되는 것도 사실이고, 일반직 공무원과 달리 선출된 공직자의 임기가 끝나거나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건 아닐 테다. 다른 곳도 아닌 대통령실 근무 경력은 안정적인 일자리로 도약할 수 있는 화려한 발판이 될 텐데, 수많은 지지자 가운데 왜 하필 지인의 자녀들이 별 경력도 없이 젊은 나이에 대통령실에 채용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반복되는 논란에 납득할 만한 해명은 아직 안 보인다.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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