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장인열전] 다루기 힘든 옻, 천년혼 불어넣는 김성호 칠장

천경환 입력 2022. 8. 5.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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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한 옻 발라 오묘한 빛 연출..생업이던 자개기술 예술로 승화
1m 나전 젓가락 선뵈는 등 옻칠 대중화 앞장..후진양성에 포부
옻칠 작업하는 김성호 칠장 [촬영 천경환 기자]

(청주=연합뉴스) 천경환 기자 = 수십 겹의 옻을 입은 학과 나비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오묘한 빛을 발산하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뽐낸다.

흡사 유리구슬이 박힌 것처럼 매끄러운 자개장 표면은 나뭇결이 고스란히 드러나 살아서 숨을 쉬는 듯하다.

몇 년이면 썩어 문드러지기 십상인 목재도 옻칠 보호막을 입으면 거뜬히 천년을 버텨낸다.

습도가 높으면 수분을 빨아들이고 낮으면 내뿜는 옻 고유의 성질 덕이다.

청주 외곽인 상당구 정북동 작은 시골 마을 어귀에는 '해봉공방' 이라고 이름붙은 아담한 2층 작업장이 있다.

충북도 무형문화재 27호인 칠장 기능보유자 김성호(65) 선생의 옻칠 작업을 하는 곳이다.

김씨는 "해봉은 '바다 해'와 '오를 봉'을 쓰는 호면서 법명"이라며 "바다에서 나는 조개껍데기 자개와 산속 옻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옻칠 작업하는 김성호 칠장 [촬영 천경환 기자]

4일 취재진이 찾아간 작업장에는 개량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김씨와 머리 희끗희끗한 만학도 두 명이 잘 다듬은 목재에 붓으로 진갈색 옻을 입히는 옻칠작업을 하고 있었다.

맞붙은 전시장에는 자개장과 여러 가지 옻 그림, 그리고 앙증맞은 식기, 수저 등 기물류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손님을 맞았다.

김씨는 "은퇴 후 옻칠을 배우겠다며 고생을 자처한 분들"이라고 함께 작업하는 나이 든 제자들을 소개했다.

칠장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을 용도에 맞게 정제해 기물 등을 칠하는 장인을 일컫는다.

독성 강한 옻을 다루는 것 자체가 힘들지만, 채취한 원액에서 수분과 나무 부스러기, 벌레 같은 불순물을 걷어내는 작업도 만만찮다.

일단 옻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은 삼베로 싸서 이물질을 제거한다. 그러고는 다시 햇볕에 말려 적당량의 수분을 날려 보낸 뒤 남은 입자를 곱게 개 정제한 옻을 만든다.

정제 옻은 색깔 있는 돌가루를 섞어 여러 가지 색으로 표현하거나 모시나 삼베에 겹겹이 입혀 원하는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활용된다.

옻칠 작업하는 김성호 칠장 [촬영 천경환 기자]

김씨는 열다섯 살 나던 해 옻칠로 생업하던 외삼촌의 권유로 옻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작심하고 달려든 옻작업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가장 먼저 옻의 독성이 그를 괴롭혔다.

우루시올 성분을 지닌 옻은 쌀통에 바를 경우 지독한 쌀벌레조차 얼씬거리지 못할 정도로 독하다.

그 역시 옻을 서툴게 다루다가 온몸에 발진이 돋고 가려움증으로 고생한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그러나 차츰 일에 익숙해지고 옻에 대한 내성도 생기면서 지금은 옻진을 맨손으로 다룰 정도의 전문가가 됐다.

배우는 과정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칠기 특유의 반들반들한 칠감을 내려면 칠하기 전 목기인 '백골'에 삼베를 포개고, 그 위에 옻을 칠하고 말려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건조한 뒤에는 거친 표면을 사포로 다듬고 낸 뒤 다시 옻을 입히는 과정을 수십차례 되풀이한다.

칠 작업은 먼지 없는 환경에서 해야 하고, 건조 과정에서도 온도와 습도를 맞추지 않으면 원하는 작품을 얻지 못한다.

인터뷰하는 김성호 칠장 [촬영 천경환 기자]

그가 어느 정도 '옻칠장이'로 성장하던 1970∼1980년대는 자개장이 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웬만큼 사는 집이면 경쟁적으로 자개장을 들이면서 시장이 급팽창했고 그의 사업장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잘 나가던 그에게도 외환위기는 엄청난 시련의 시작이 됐다.

경기 불황에다가 아파트 붙박이장 문화 등이 확산하면서 순식간에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할 만큼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는 한 번도 손에서 칠붓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나전칠기 이성운 장인의 작품 전시회를 보게 됐고, 그곳에서 지금껏 자신이 만든 자개장은 한낱 공산품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현실의 벽을 실감했다.

"당시 전시품들은 생활 도구라기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었어요. 한 마리도 뒤통수를 세게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죠"

그는 그 길로 이 장인을 찾아가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고는 그의 문하생이 돼 10년 넘게 옻칠 기술을 다시 배웠다.

옻칠 공예품 소개하는 김성호 칠장 [촬영 천경환 기자]

그는 "정말 무언가에 홀린 듯이 옻에 빠졌던 시기"라며 "밤잠 설치며 옻과 씨름하다 보니 손가락 지문이 모두 사라져 주민등록증 발급에 어려움을 겪었을 정도"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그는 옻칠 장인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경기도 우수 공예인으로 활동하던 그는 2003년 낯선 청주로 거처를 옮겨 정착했다.

세계적 공예 축제인 청주 공예비엔날레가 열리는 곳이어서 옻칠의 가치를 알릴 기회가 더 많을 것으로 판단해서다.

이후 각종 공예전에 이름을 올리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계란 껍질로 칠기 무늬를 만드는 기술까지 개발했다.

이런 공로로 2008년 칠기 명장이 됐고, 2013년 충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옻칠 작업하는 김성호 칠장 [촬영 천경환 기자]

그는 옻칠공예 대중화에도 힘을 쏟았다.

2016년 청주에서 열린 '한중일 젓가락문화포럼'에 맞춰 길이 1m의 초대형 나전 젓가락을 선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이 젓가락을 만드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는 후문이다.

그는 "작은 나전 젓가락 한 쌍을 만드는 데도 한 달은 족히 걸린다"며 "상징성 있는 작품을 통해 전통공예의 섬세함과 우수성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마 남지 않은 고희전에서는 현대감각을 더한 옻칠 공예품을 선보여 전통문화가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보여주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옻칠 명장답게 후진 양성에 대한 욕심도 내비쳤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전통이라는 용어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옻칠을 제대로 배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더 늙기 전에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공예를 이어갈 후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이어 "예술을 하면 배곯는다는 얘기가 더는 나오지 않도록 정부 지원과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며 "원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우리 공방에서도 옻칠의 가치를 체험하게 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kw@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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