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식량 안보 초비상]팬데믹·기상이변에 전쟁 겹쳐, 지구촌 밥상 물가 폭등..식량 무기화 우려 커져
SPECIAL REPORT
불안정한 국제 식량 시장은 세계 각국의 식량 안보에도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급은 줄고 가격은 크게 오르면서 각 나라들도 식량 확보에 사활을 걸고 나섰다. 특히 최근의 글로벌 식량난이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관측이 힘을 얻으면서 자국의 식량 안보 사수를 위한 치열한 물밑 경쟁 또한 가속화하고 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대로 가다가는 전 지구적으로 코로나 후유증 못지않은 식량 안보 비상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작년 1억9300만명 ‘심각한 식량 불안정’
식량 안보 위협이 커지면서 전통적 군사동맹으로 맺어진 세계 안보 지형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지난달 14일 미국은 아랍에미리트(UAE)·이스라엘·인도 등과 지구촌 식량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각국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만든 ‘I2U2’라는 국가 협력체까지 결성한 이들 국가는 이날 첫 화상 정상회담에서 1순위 의제로 식량 안보를 택해 주목을 모았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주요국 정상들이 외교안보 이슈가 아닌 글로벌 식량 문제를 첫 논의 대상으로 삼은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최근의 식량 위기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처럼 전 세계가 식량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지구촌 식량 안보 이슈가 기존 국제 질서까지 흔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지난 5월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이 발표한 ‘2022 세계 식량 위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심각한 식량 불안정’ 단계에 접어든 인구는 53개국 1억9300만 명으로 집계됐다. 더 나아가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에너지 수급난까지 더해지면서 1억8000만 명가량이 추가로 식량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됐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분배의 불균형이다. 각국의 잇단 봉쇄 정책과 물류 시스템 마비 등으로 글로벌 수급망이 깨지면서 지구촌 전체가 식량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종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보릿고개라고 불리던 1960~70년대의 경우 농업 생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주요 곡물량 자체가 부족해 문제가 생겼다면 최근의 글로벌 식량 위기는 물류 대란 등으로 식량에 대한 접근 장벽이 높아지면서 발생한 것이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며 “더욱이 이번엔 인플레이션 등 적잖은 경제적 후폭풍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가 식량 안보 위기 국면이라고 진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식량 대외 의존도 높은 중견국들 위태
이 같은 식량 안보 위기가 경제 규모가 작은 신흥 개발국가나 식량 대외 의존도가 높은 중견국가들부터 위태롭게 한다는 점도 국제사회의 우려를 키우는 요인 중 하나다. 국민 소득의 대부분이 먹는 데 쓰이는 저개발국가의 경우 미국·유럽 등 선진국보다 식량 부족에 따른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이른바 ‘식량 안보의 불평등성’이다.
먹거리 수출 제한, 국제관계 재편 조짐도
국제사회는 글로벌 식량 안보 위기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제 농업시장 조사 업체인 우크라그로컨설트는 우크라이나가 이번에 합의한 3개 수출 항구를 8월부터 연말까지 최대한 가동해도 곡물 교역량을 전쟁 이전 수준(2500만t)까지 끌어올리기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롭 보스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가능성과 서방의 러시아 추가 제재 등 국제적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식량 시장 안정화를 논의하기엔 이르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 같은 식량보호주의 움직임이 국제 통상 질서의 변화와 함께 먹거리를 둘러싼 새로운 국제관계 재편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오랫동안 정치·외교·안보 중심으로 짜인 국제 네트워크가 2010년 이후 반도체와 에너지 위기 앞에서 흔들리게 되면서 기존의 안보 동맹 노선에 속하던 국가들도 점차 자국의 이해득실을 먼저 따지기 시작했다”며 “이젠 밑바닥 경제라고 할 수 있는 식량 문제마저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향후 식량 이슈가 정치 무기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고 내다봤다.
반면 일각에선 작금의 식량 안보 위기가 오히려 기존의 동맹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윤석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강대국들의 기싸움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식량과 에너지가 상대방에 대한 주요 압박 수단으로 활용되는 모습”이라며 “이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식량 안보 이슈가 신냉전을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나윤 기자 kim.nay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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