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노인들이 요양원 대신 선택한 것

취리히·김진경 2022. 8. 6.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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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의 평범한 이웃, 유럽] 스위스 노인들은 삶의 마지막을 돌봄 시설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변화가 생겼다. 방문 돌봄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었다. 노령 사회의 돌봄 과제를 해결하는 중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정부가 운영하는 ‘슈피텍스(방문 돌봄)’ 서비스를 받고 있는 스위스의 노인. ⓒ빈터투어시 웹페이지

스페인에 사는 시어머니가 몇 달 전 스위스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가족이 다 함께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내 팔을 붙들고 걷던 시어머니가 일부러 속도를 늦추는 게 느껴졌다. 당신 아들과 손주들은 저만치 앞서가고 옆에 나만 남게 되자 시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내가 너한테 꼭 당부하고 싶은 게 있었어. 네 남편한테 말해두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서 너한테도 약속을 받아내려고 한다.” 심각한 분위기였다.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나는 절대 요양원은 안 간다. 죽더라도 내 집에서 죽고 싶어. 반(半)송장들이 온종일 무표정한 얼굴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곳에 들어가기는 죽어도 싫다.” 시어머니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며느리에게 본인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반송장’ 흉내까지 냈다.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입을 살짝 벌리며.

“어머니가 싫다는데 누가 요양원에 강제로 집어넣을 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내 말에도 시어머니의 불안한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을 방문해 시어머니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사회복지사가 ‘곧 요양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미 여러 번 말했다고(시어머니 표현에 따르면 강요했다고) 한다. 남편은 외아들이다. 시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혼자 사는 고령의 여성에게 사회복지사의 말이 압박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시어머니가 몸 이곳저곳이 성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도 받았다.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병원 갈 일이 생긴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요양원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는 못 된다. 시어머니는 버거워하면서도 여전히 혼자 요리와 청소를 하고, 주말이면 노인학교에 간다. 키우는 강아지와 산책도 한다. 요양원에 가면 노인학교와 강아지를 포기해야 한다. 입 짧은 시어머니에게 남이 해주는 음식은 달가운 게 못 된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사적인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내가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나만의 시공간을 지배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하니 끔찍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그의 뜻을 지지해주고 싶었다. 나는 시어머니 손을 잡고 말했다. 설령 당신 아들이 당신을 요양원에 보내려고 해도 내가 막을 테니 걱정 말라고. 다른 돌봄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예전보다 덜하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은 자녀가 부모의 노년을 책임지는 문화가 강하다. 그에 비해 유럽 노인들은 삶의 마지막 시기를 돌봄 시설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시어머니가 사는 스페인이나 내가 사는 스위스나 마찬가지다. 요양원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노인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요양원행을 택한다.

아무리 서비스가 좋은 곳이라 해도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즐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양원 비용이 저렴한 것도 아니다. 가진 재산을 요양원 비용으로 다 쓰고 떠나는 경우가 흔하다. 스위스에서는 요양원 입소자가 사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년6개월 정도다. 평생 일군 재산을 생의 마지막 몇 해에 돌봄 비용으로 지불하는 셈이다.

팬데믹으로 바뀐 노인 돌봄 형태

그런데 이런 문화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스위스 연방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스위스 요양원 거주자 수는 15만8433명으로, 2019년에 비해 4%가 줄었다.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한 2006년 이후로 요양원 거주자가 전년도보다 감소한 건 처음이다. 노년 인구가 계속 증가 중임을 감안하면 더 놀라운 일이다. 일간 〈타게스 안차이거〉의 보도에 따르면, 취리히 시내의 한 요양원은 이용자 감소로 결국 폐업하고 현재 예술가들이 사용 중이라고 한다.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이 요양원을 선호하지 않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닐 텐데 왜 2020년에 처음 이용자가 줄었을까.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2020년 요양원 거주자 수가 줄어든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신규 입소자 수가 전년도보다 10% 이상 줄었다. 팬데믹 와중에 요양원에 입소하는 게 더 꺼려졌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도 팬데믹 중 요양원 방문이 엄격히 제한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팬데믹의 주요 희생자가 노년층이었다. 2020년 스위스 전역의 요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총 3만4572명으로, 이는 전년도보다 16% 증가한 수치다. 입소자는 줄었는데 사망자는 늘어났으니 결과적으로 총 거주자가 감소하고 문 닫는 요양원까지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혼자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노인들이 요양원 입소 대신 택하는 건 무엇일까. 방문 돌봄 서비스다. 스위스에서는 이 서비스를 슈피텍스(Spitex)라는 비영리기구가 담당하고 있다. 슈피텍스 서비스에는 투약 등 간호 업무(72%), 요리나 청소 등 가사 업무(24%), 교통수단 이용 등 기타 업무(4%) 등이 포함된다. 팬데믹 때 이용자가 줄어든 요양원과는 반대로 슈피텍스는 2019년에 비해 2020년 이용자가 6.7% 증가했다. 2022년 현재 약 42만명이 슈피텍스를 이용한다. 서비스는 일시적 돌봄과 장기 돌봄으로 나뉘는데, 장기 돌봄의 경우 10년 전보다 이용자가 두 배로 늘어났다. 스위스의 80세 이상 인구 중 30% 이상이 슈피텍스를 이용한다.

요양원은 24시간 밀착형, 슈피텍스는 특정 시간 선택형으로 돌봄 방식이 다른데, 그 때문에 비용도 차이가 난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나라 중 하나인 만큼 요양원 비용도 만만찮다. 장기 이용자 1인당 한 달 거주비용은 평균 9122스위스프랑(약 1236만원)인데, 개인이 이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 건강보험에서 43%가 지불되므로 개인 부담은 절반 정도다. 요양원의 유형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2020년 기준 스위스 전역의 요양원은 약 1550곳으로, 이 중 25%는 국립, 30%는 일부 정부 보조를 받는 사립, 그리고 나머지 45%는 보조금 없는 사립이다. 재산이나 연금 액수에 따라 요양원 선택지가 달라지고, 국립이냐 사립이냐에 따라 서비스의 질도 차이가 난다.

슈피텍스는 이용자가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만큼만 제공받는 서비스라 더 효율적이다. 이는 스위스 건강보험제도 개혁과도 관련이 있다.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건강보험법이 1994년 도입됐고, 그 직후인 1995년에 슈피텍스가 설립됐다. 그리고 슈피텍스 서비스 비용의 약 39%를 건강보험이 부담하도록 했다. 나머지 비용 중 42%는 정부가 지원하기 때문에 이용자는 19%만 내면 된다. 스위스 연방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슈피텍스 이용자들이 실제로 지불하는 금액은 월평균 600스위스프랑(약 81만원)이다. 요양원 개인 부담액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하다.

‘청년을 배신하고 노인을 처벌한다’라고 쓰인 스위스의 연금개혁안 반대 포스터. 이 안은 2017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Swissvotes.ch

방문 돌봄 이후 복지 예산도 절약

개인 지불 비용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따져보자. 스위스 북서부응용과학대학(FHNW)이 바젤 지역의 실제 데이터를 이용해 연구를 했는데, 슈피텍스 이용자가 늘면 정부도 복지 예산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결론이었다. 예를 들어 하루 두 시간 반 정도의 돌봄이 필요한 노인이 있다고 하자. 이 노인은 여러 종류의 약을 챙겨 먹어야 할 때와 목욕을 할 때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스스로 요리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런데 이 노인이 요양원에 가면 서비스에 식사가 기본적으로 포함된다. 필요하지도 않은 돌봄을 받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고, 경우에 따라 이 비용의 일부는 정부가 부담하게 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바젤 정부가 특정 기간 요양원 거주자들에게 지원한 금액은 3만7000스위스프랑(약 5000만원)이었고 집에 머물며 슈피텍스 돌봄 서비스를 받은 사람들에게 지원한 금액은 5000스위스프랑(약 677만원)이었다. 슈피텍스 서비스 확대는 일자리 창출과도 연결된다. 슈피텍스 근무자의 자격요건은 병원이나 요양원 근무자에 비해 덜 까다로워서 단기간 직업교육만 이수해도 가능하다. 그런 직원들이 현재 총 5만6000명에 이른다. 슈피텍스 일자리와 관련해 최근 나오는 주장은 더 흥미롭다. 집에서 배우자나 부모의 병간호를 하는 것이 슈피텍스 근무로 인정되도록 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가족을 돌보는 게 정식 직업이 되고 급여도 받을 수 있다. 아직은 논의 초기 단계이지만, 급격히 노령화가 진행 중인 사회의 돌봄 과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노인 돌봄 과제를 말하면서 시설과 인력에 대해 짚었지만, 사실 핵심은 돈이다. 요양원에 가든 슈피텍스 서비스를 이용하든 돈이 필요하다. 빈곤한 노인은 서비스의 효율성을 따질 선택권조차 없다. 노년기 재정 상황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자리(은퇴 연령), 다른 하나는 연금이다. 스위스에서도 이 둘을 현실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여러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스위스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평균수명이 가장 긴 나라 중 하나다. 2020년 출생자의 기대수명은 83.1세로, 세계 최장인 일본(84.6세)이나 한국(83.4세)과도 큰 차이가 없다. 공식 은퇴 연령은 남성이 65세, 여성이 64세다. 이것을 남녀 모두 65세로 통일한 뒤 나아가 67세로 상향 조정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나, 스위스의 국민투표제도가 걸림돌이 됐다. 지난 30년간 연금제도 개혁안이 국민투표 안건에 총 세 번 올랐으나 모두 부결됐다.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당장 더 일하고 더 적게 받자는 내용에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금제도 개혁안은 오는 9월 다시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노년층 빈곤율은 기대여명, 공식 은퇴 연령, 실질 은퇴 시기, 연금제도, 돌봄 서비스 비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나는 결과다. 스위스처럼 잘사는 나라도 전체 빈곤율(9.2%)에 비해 65세 이상 노년층 빈곤율(16.5%)이 훨씬 높다(OECD, 2021). 노년층에서도 남성 빈곤율(14.7%)보다 여성 빈곤율(18.0%)이 높다. 노동시장이 여성에게 불리한 구조이고 배우자 연금에 의지하는 여성들이 많은 점이 한 가지 이유다. 한국은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노년층 빈곤율(43.4%)이 전체 빈곤율(16.7%)의 세 배에 육박한다. 특히 65세 이상 여성 중 약 절반(48.3%)이 빈곤층에 속한다. OECD 국가들 중 최악의 수치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는 부양 의무와 돌봄받을 권리를 동시에 고민한다. 한국에 있는 내 부모와 스페인에 있는 내 시어머니는 어떤 노년을 보내게 될까. 스위스에 사는 나는 내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노년을 즐길 수 있을까. 노년 인구 비중이 늘어나는 추세는 비슷해도 대응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 ‘어디에서 사느냐’보다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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