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식사(食史)] 마하트마 간디가 빚어낸 소금 독립

입력 2022. 8. 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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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간디의 소금 행진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격주 토요일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소금. 게티이미지뱅크

소금장수가 결혼할 여자의 집에 찾아간다. 부모의 승낙을 받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장인 될 이는 소금장수를 대놓고 홀대한다. 사농공상의 시대에서 장사꾼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리라. 이를 알아챈 소금장수는 장인 될 이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다. 그리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맛있는 음식을 잔뜩 내놓지만 웬걸, 장인 될 이는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음식에 소금간이 하나도 안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눈치는 있는지, 장인 될 이는 소금장수의 메시지를 알아차린다. 내가 중요한 사람을 홀대했구나.

소금만큼 하찮으면서도 중요한 식재료가 있을까? 음식의 맛을 내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맡지만 인체를 구성하는 성분으로도 소금은 꼭 필요하다. 그렇기에 소금은 통치와 지배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식민 통치 시절 영국이 인도에 제정한 간염법과 소금세이다. 이에 맞서 간디는 몇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소금 행진을 벌여 비폭력 저항의 기치를 이어나갔다. 덕분에 인도는 독립과 자치에 몇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는 한편, 여성의 운동 참여에도 확실한 계기를 마련했다. 염분 섭취가 중요한 한여름을 맞아 간디의 소금 행진에 대해 살펴보자.


간디의 생애

간디 초상화가 인도 국경 지역에 걸려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인도의 정신 및 정치적 지도자인 간디(1869~1948)는 인도의 구자라트주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였지만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마하트마, ‘위대한 영혼’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마하트마 간디’라 칭해졌다.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며 스스로를 ‘가난한 탁발승’이라 일컬었지만 간디는 원래 부유한 가문의 자손이었다. 아버지인 카람찬드 간디는 인도의 소공국인 포르밴더의 총리를 지냈으며, 간디는 영국의 이너 템플 법학원에서 유학했다.

22살이었던 1891년 6월, 간디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인도로 귀국했으나 2년 동안 이렇다할 실적을 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1893년, 인도인 상인을 변호하러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했다가 21년 동안 거주하게 된다. 그동안 차별받는 인도인들의 실상을 몸소 경험한 간디는 1915년, 45살의 나이로 인도에 돌아와 인도인의 권리 향상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1년 인도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된 뒤 가난 탈피, 여권 신장 등을 위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어 나간다.


소금 행진

마하트마 간디(가운데)가 1930년 3월 시민들과 함께 소금행진을 시작했다. 위키피디아 캡처

소금 행진은 1930년 3월 12일부터 4월 30일까지 벌어진 비폭력 저항 운동이다. 영국은 1882년부터 식민지 인도에 불공정하고도 엄격한 간염법과 과세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어디도 아닌 바로 인도에서 채취한 소금을 영국으로 운송해 가공을 마치고, 이를 다시 인도에 엄청난 세금을 매겨 되팔았다. 소금령에 의하면 인도인은 소금을 직접 만들어 쓸 수 없었고, 천일염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체포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도인들은 억지로라도 비싼 소금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간디의 소금 행진은 이런 불공정한 과세 정책에 직접적이면서도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종내에는 엄청난 성과를 이끌어 낸 소금 행진이었지만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다른 수단도 아니고 소금이라니 너무 사소하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인도 독립 운동을 주도하던 동료 운동가 및 정치인들도 의구심을 품었다. 인도의 유력지 스테이츠맨은 “소금이라니 웃음을 참기가 어렵다. 지각이 있는 인도인이라면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라고 만평했다.

그러나 간디에게는 나름의 확고한 계산이 서 있었다. 소금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하며 또 구체적인 생필품이다. 따라서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거창한 정치적 권력의 확보를 위한 운동에서 모든 계층에게 속속들이 호소할 가능성이 높았다.

1930년 2월 5일, 인도의 신문들은 일제히 간디가 소금법에 불복종하는 시민운동을 펼칠 거라 보도했다. 소금 행진은 간디가 주창한 ‘사트야그라하’의 일환이었다. 산스크리트어 ‘사트야(진실)’와 ‘아그라하(저항하다)’의 조어인 사트야그라하는 인도 독립과 자치를 위한 수단으로, 간디는 이미 1920년부터 불복종 운동 등을 통해 행동에 옮겨 왔었다. 소금 사트야그라하는 3월 12일 출범해 4월 6일, 단디에서 간디가 소금법에 불복종함으로써 막을 내린다는 일정이었다.

행진에 나서기 열흘 전인 3월 2일, 간디는 어윈 남작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친구에게, 당신을 존경하기에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고 운을 뗀 편지에는 11개의 개혁안이 담겨 있었다. 군비 축소와 수입 섬유의 관세 처리, 소금세의 폐지 등이 골자였다. 정중한 요구였지만 애초에 소금 행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어윈 남작은 편지의 제안을 무시했고 간디와의 회담도 거부했다. 간디는 “무릎을 꿇고 빵을 요구했지만 돌을 받았다”고 반응했다.

간디의 소금 행진을 기념해 발행된 우표. 게티이미지뱅크

3월 12일, 간디가 드디어 소금 행진에 나섰다. 처음 참가 인원은 78명이었고 그마저도 간디가 이끄는 아슈람(수도원 혹은 암자)의 일원들이었다.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소금 행진을 마치기 위해서는 규율을 엄수해야 하므로 그가 활동했던 인도 국민회의의 일원들은 제외시킨 결정이었다. 소금행진은 구자라트주의 사바르마티에서 출발해 단디까지 이르는 385킬로미터의 긴 여정이었다. 모두 흰 카디(수제 직물로 만든 민속 의상)를 입고 참가했기에 소금 행진은 ‘흐르는 흰 강’이라 불렸다. 일정이 거듭될수록 자발적인 참가자가 늘어나 행진의 길이는 3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르는 곳마다 몇 만 단위의 인파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4월 6일, 단디에 이른 다음날 아침 간디는 기도를 마친 뒤 소금기가 밴 진흙을 손에 쥐고 들어 올리며 선언했다. “나는 소금을 만들어 대영제국의 근간을 흔들겠노라.” 그리고 바닷물을 끓여 불법으로 소금을 채취했다. 그리고는 행진에 참가한, 이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이들에게 같이 소금을 만들자고 격려했다. 이후 인도 전역으로 행진의 정신이 퍼져 나가면서 불법으로 소금을 채취하거나 구매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갔다. 간디는 자신이 만든 소금을 1600루피(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730만 원)에 팔았고 그 대가로 영국 경찰에 체포당했다. 그렇게 체포된 이들이 간디 외에도 6만 명이 넘었다.

소금을 통해 촉발된 사트야그라하의 추진력은 곧 전방위로 뻗어나갔다. 인도인들은 영국의 의류 및 생필품에 불매 운동을 벌였으며 부당한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저항도 벌였다. 이에 영국은 더 많은 법을 제정하고 검열을 하는 동시에 인도 국민회의를 불법 단체로 규정짓는 등 사태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어떤 조치로도 원하는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오늘날 인도의 소금

아가리야족 노동자가 인도 리틀 란 지역의 염전에서 소금을 채취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비즈니스 인사이더’ 캡처

소금 행진으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도는 독립했고 소금도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소금을 채취하는 이들은 여전히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도는 세계 최고의 소금 생산국인데, 사막 한 군데에서 전체의 3분의 1가량을 채취한다. 바로 쿠치의 리틀 란(Little Rann of Kutch) 지역이다. 원래 이 지역은 수천 년 전 아라비아해의 일부였으나 1819년의 지진으로 인해 주변을 흐르던 강의 방향이 바뀌면서 사막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진흙의 밑에 배어 있는 물은 바닷물보다 열 배나 염분이 강해 소금을 채취하기에 적절하다. 이곳에 매년 아가리야(Agariya)족이 찾아와 소금을 채취한다.

리틀 란의 소금 생산은 10월부터 시작된다. 6월부터 4개월 동안 내리는 빗물이 진흙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면 아가리야족이 사막으로 찾아온다. 이동에 드는 비용을 부담할 수 없기에 이들은 6개월 동안 삶의 터전을 완전히 이곳으로 옮긴다. 깊이가 10미터에 이르는 우물을 일주일에 걸쳐 파고 나면 펌프를 통해 소금물을 퍼올리고, 이를 순전히 손과 발로만 진흙을 쌓아 테두리를 만든 염전에 가둔다. 전부 10~20군데에 이르는 염전을 만들고 나면 태양광으로 물을 증발시켜 소금 결정을 얻어낸다.

섭씨 48도에 이르는 폭염과 결국은 눈을 멀게 만드는 태양광, 피부 질환을 일으키는 염분을 견뎌가며 몇천 톤의 소금을 채취한 대가는 1톤당 5,000원 수준이다. 소금은 가공 과정을 거쳐 1톤당 40만 원까지 가격이 치솟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적은 대가이다. 1년의 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노동력을 투입한 대가는 경비를 빼고 나면 250만 원 수준, 이 금액으로 온 가족이 다음 해의 소금 수확철까지 살아야 한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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