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 공항의 눈물.. 그 속에 우리가 있다

전병호 입력 2022. 8. 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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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으로 떠나는 유목민의 후예들

[전병호 기자]

"안녕~하스요?"

키르기스스탄의 촐폰아타 근처 이식쿨 호수가 보이는 '악 베르멧' 노천온천에서 있었던 일이다. 분명 한국어인데 그 말이 수염 달린 이방인 입에서 나온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한번 우리 일행을 향해 "한국 사람 맞아요?"이런다.

"나 한국 3년 있었어요. 창녕, 양파, 3년 있었어요."

타국에서 우리말을 들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아는 체를 하며 악수를 나눴다. 아마도 산업연수제도를 통해 한국에 다녀온 청년인 듯했다.
  
▲ 영업 중인 유목민의 후예들 제티오구즈 계곡 초원 트레킹 중에 만난 승마체험 영업 중인 유목민의 후예들
ⓒ 전병호
 
돈을 따라 도시로 간 유목민의 후예들

1991년 소련연방 해체 이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던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도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서히 외국 자본이 들어오고 석유 등 매장 자원을 개발하면서 시장경제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 농지나 기타 자원이 별로 없는 키르기스스탄 사람들도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나아갔다.

많은 젊은이들은 유목의 삶을 접고 구소련 시절 최대 도시인 모스크바나 인접 국가인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알마티(카자흐스탄) 등 대도시로 돈을 따라 떠나갔다. 실제 키르기스스탄 경제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송금경제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그 규모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17%(2006년), 31.5%(2013년), 33%(2021년)라고 하니 다른 산업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은행보다 환율이 유리하다며 가이드가 안내한 환전소 거리를 가보니 즐비하게 늘어선 환전소들이 이 나라 송금경제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 환전소 거리 키르기스스탄 곳곳에서는 길거리 환전소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송금경제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 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전병호
키르기스스탄은 1998년 중앙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등 소련연방 해체 이후 가장 먼저 서구적 시장경제를 도입한 국가였다. 하지만 신생 독립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기집권에 따른 부정부패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자원환경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키르기스스탄의 GDP는 2021년 기준 74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1123달러(KOTRA)라고 하니 그 경제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키르기스스탄의 화폐단위는 솜(KGS)이다. 1 솜을 현재의(2022년 7월 기준) 환율로 환산하면 1 솜=17원 정도이다. 키르기스스탄 대형마트에서 맥주 1병이 50~80 솜(한화 850원~약 1200원, 수입맥주는 가격이 더 비쌌음) 안팎이었다. 이 나라 물가에 비하면 싸다고 할 수 없으나 술꾼인 나에겐 우리나라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체적으로 제조업이 열악한 나라이다 보니 공산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고 농산물과 특히 축산물, 유가공품 등 가격은 매우 저렴하다.

여행 중 끼니마다 메뉴에 양고기 샤슬릭과 양고기로 만든 각종 요리를 1~2개쯤 올렸으니 고기만큼은 어느 나라보다 가성비 최고인 나라다. 시내 식당에서 우리 일행 4명이 4~5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생맥주를 인당 1~2잔씩 마셨는데도 5~6만 원 정도 나왔으니 우리나라 대비 25~30% 가격선이었다. 시내를 벗어나면 그 가격은 훨씬 저렴해질 것이니 '먹고 마시자 여행족'들에겐 천국 같은 나라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대부분 음식 맛도 우리 입맛에 착착 붙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 대형마트 과일 판매대 위에 가격표는 1kg당 가격이다. 가늠을 못하고 체리 1kg을 샀는데 양이 얼마나 많던지 내내 끌고 다니다가 버려야 했다.
ⓒ 전병호
   
▲ 샤슬릭 거의 매 끼니 먹었던 양고기 샤슬릭, 키르기스스탄 대표 음식 중 하나로 고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샤슬릭 맛 하나로도 키르기스스탄을 다시 찾을 명분으로 충분하다.
ⓒ 전병호
   
▲ 양고기 음식들 양고기와 감자, 토마토 등을 함께 볶은 쿠르닥과 쿠르닥 위에 얇은 만두피 같은 것을 얹은 양고기 요리: 우리 입맛에 딱 맞아 좋았다.
ⓒ 전병호
 
키르기스스탄 청년들의 코리안 드림

키르기스스탄은 우리나라와 고용허가제 근로자 도입 협정을 맺은 국가 중 하나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자료에 의하면 2007년에 협약을 맺어 2022년 5월까지 누적 5193명의 키르기스스탄 인력이 한국에 취업했으며 현재 국내 취업 중인 인력은 773명(2022년 5월 기준)이라고 한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인력송출이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재개했는데 우리 귀국 비행기에 같이 탄 산업연수생들이 금년 들어 최대 인원 입국이라고 주한 키르기스스탄 대사관 관계자가 귀띔해주었다. 키르기스스탄 근로자들은 체력도 좋고 정이 많으며 성실하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향후 취업자는 더 늘 것으로 예상한다고도 했다. 
 
▲ 키르기스스탄 산업연수생들 지난 7월 12일 입국하는 90여 명의 키르기스스탄 산업연수생들.
ⓒ 전병호
 
공항의 이별... 눈물의 이별 속에 우리가 있었다

출국 비행기가 연착되어 현지 시간 밤 12시가 다 되어 출국 수속을 시작했다. 출국장으로 막 들어가는데 게이트 근처에 한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임신한 젊은 여성이 울고 있었고 그를 위로하는 듯한 한 남자 그리고 또 한 청년이 뒤돌아서서 울고 있었다.

게이트 건너편에 여권과 항공권을 손에 쥔 젊은 남자가 연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돈 벌러 한국으로 떠나는 가장을 배웅하는 모습 같았다. 남의 가족 슬픈 이별을 빤히 쳐다볼 수가 없어 못 본 척 지나쳐 가다 힐끗 뒤돌아보았다. 젊은 임신부는 연신 눈물을 찍어 내고 있었고 청년도 여전히 울고 있었다. 어떤 이별이든 슬프지 않은 이별은 없고, 어떤 이별이든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우리 부모 세대가 가족을 위해 머나먼 타국 땅으로 돈 벌러 가야 했던 얘기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흑백 화면 속 태극기를 흔들며 파견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환송하던 눈물의 이별 장면이 지나갔다. 내가 태어난 1967년 당시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보내온 송금액이 한국 상품 수출액의 35.9%, 무역외 수입의 30.6%를 차지했다고 하니 송금경제에 의존하고 있는 키르기스스탄 현실과 교차되며 여러 생각이 스쳤다.
 
▲ 키르기스 산업연수생 코로나 19로 입국이 지연 되었던 키르기스스탄 산업연수생 90여 명이 귀국 비행기에 동승하였다. 2022년 7월11일.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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