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푸른 바다와 초록빛 숲.. 브라질 마법의 섬으로

한겨레 2022. 8. 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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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노동효의 지구 둘레길 브라질 플로리아노폴리스
브라질 동남부 플로리아노폴리스
섬 절반은 생태보존 청정지역
요트 등 해양스포츠 장소 인기
자연 지키는 현지인 노력 빛나
플로리파 바하다라고아 마을의 선착장. 노동효 제공

“내 고향은 마법의 섬이야!”

남아메리카 여행 중 만났던 치아구는 제 고향을 ‘매직 아일랜드’라고 불렀다. 그가 애향심에서 제멋대로 붙인 별명은 아니었다. 브라질 동남부에 자리한 플로리아노폴리스는 한국인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진작부터 세계인에게 ‘마법의 섬’으로 알려져왔다. 현지인들은 도시명을 줄여서 ‘플로리파’라고 부른다.

제주도보단 작지만 거제도의 2배가량 넓이인 플로리파는 ‘거제도’와 ‘거제대교가 잇닿은 육지 일부’를 포함하는 모양새로 섬 절반은 생태보존구역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힐링하기 좋은 곳’이겠구나 하고 추측할 것이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플로리파를 설명하려면 몇가지 사항을 추가해야 한다.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어업 종사자가 다수일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시민의 대다수가 아이티(IT)산업과 서비스산업 종사자다.

〈뉴스위크〉는 플로리파를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10개 도시” 중 하나로, 브라질 유력 주간지 〈베자〉는 “브라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는다. 아파트와 빌딩이 즐비한 도심을 벗어나 차로 잠깐만 달리면 하얀 모래가 깔린 해안선이 펼쳐지는데 공식적으론 42개, 비공식적으론 100개가 넘는 해수욕장이 있다. 시민들은 휴일이나 퇴근 후 요트, 서핑, 패들보딩 등 다양한 해양스포츠를 즐긴다. 실리콘밸리가 푸른 바다와 초록빛 숲이 어우러진 거제도에 있는 셈이다.

플로리아노폴리스의 바하다라고아 해변. 노동효 제공
플로리아노폴리스 도심 풍경. 노동효 제공

인류를 친구로 만드는 접착제

쿠리치바를 출발한 버스가 4시간가량 달려 본토와 섬을 잇는 페드루대교를 건넜다. 대교와 나란히 브라질에서 가장 긴 현수교이자 플로리파의 랜드마크 에르실리우루스 다리가 보였다. “이제 어디로 가?” 휴가차 브라질을 찾은 <인간극장> 지현호 피디가 물었다. “가장 유명한 해변은 두스잉글레지스인데 지금(브라질의 8월은 겨울이다)은 해수욕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라서 친구가 히피들이 많이 찾는 바하다라고아를 추천하네.”

터미널에서 갈아탄 택시가 언덕을 올랐다가 동쪽으로 난 고개를 넘었다. 섬이 품은 석호, 콘세이상이 내려다보였다. 정박한 요트와 패들보드 타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호숫가 따라 부티크 상점과 호스텔 간판이 즐비했다. 10여분을 더 달린 뒤 택시가 섰다. 예약한 숙소는 차가 닿지 않는 언덕 위에 있었다. 전망만 좋다면야! 숙소에 도착하자 바다가 발아래 펼쳐졌다. 일대에서 ‘가장 멋진 전망을 갖춘 히피풍 호스텔’이란 리뷰가 틀리지 않았구나!

숙소에서 나와 등대 쪽으로 갔다. 아이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또래 청소년이 사십대 현호에게 말을 걸었다. “세일링을 하니?” “어, 어떻게 알아?” 현호가 놀라자 ‘코리아 세일링’이란 마크가 붙은 현호의 셔츠를 가리켰다. “나도 세일링하는데… 이 옷은 세일링 클럽 셔츠야!” 그렇게 한참 요트 얘기를 하다가 갑작스레 웃통을 벗었다. “기념으로 이 셔츠를 선물로 줄게!” 같은 취미를 가진 한국인을 만나 더없이 기쁜 표정이었다. ‘공통의 취미’는 국적, 나이 막론하고 인류를 친구로 만들어주는 접착제다. 취미를 누리기 어려운 사회일수록 세대 간 단절이 심하다고 하던가? 해변에선 아버지와 아들이 ‘카포에이라’(브라질 전통무술)를 하고 있었다. 바다에선 소년들이 ‘서핑’을 하고 있었다. 공용주차장엔 퇴근한 직장인들이 차에서 ‘패들보드’를 내려놓고 있었다. 바하다라고아의 평일 저녁 풍경이었다.

다음날 원고마감일이 닥친 터라 숙소에서 노트북을 붙잡고 앉았다. 외출하고 돌아온 현호가 물었다. “어제 만났던 백패커스호스텔 직원 말이야. 또 마주쳤어. 저녁에 스시 파티 한다고 놀러 오래. 어떻게 할까?” “어떡하긴, 얼른 원고 보내고 마시러 가야지!” 현호가 면세점에서 사온 고량주를 챙겨 들고 파티 장소로 갔다. 숙박객이 갹출해서 횟감용 물고기를 사고, 주방장이 회를 뜨고, 호스텔 바에선 술을 팔았다. 맥주를 들이켜던 이들이 고량주를 보더니 환호하며 인사를 건넸다. 미국 출신 제인과 존은 이틀 묵을 작정으로 플로리파에 왔는데 일주일이 지났고 다른 도시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하소연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매직 아일랜드!”

서핑을 마치고 카포에이라를 수련 중인 아빠와 아들. 노동효 제공
서핑하고 나오는 아이들 뒤로 패들보드를 타는 어른들이 보인다. 노동효 제공

“아임 낫 퍼펙트, 아임 리미티드 에디션”

“근데 왜 매직 아일랜드인 줄 아니?” 현지인 호세가 물었다. “아름다운 바다, 안전한 도심, 멋진 리조트, 맘껏 누릴 수 있는 해양스포츠!” 제인이 대답하자 호세가 고개를 저었다. “그 별명이 붙은 건 마녀와 괴물 때문이야. 아조레스에서 온 이민자들이 사는 정착촌엔 마녀가 어부의 배를 훔치거나 그물로 장난을 쳤다는 얘기가 파다해. 동굴에 사는 마법사가 다친 어부를 어떤 식물로 치료하고 사라졌다는 얘기도 유명하지. 새벽에 그물을 걷으러 간 어부가 괴물을 목격했다는 소문도 널리 퍼져 있어. 어부가 어둠 속에서 본 건 물개였을 테지만. 유럽과 다른 환경에서 오는 두려움이 마녀와 마법사와 괴물을 만들었고 그런 전설로 인해 플로리파가 ‘마법의 섬’이 된 거야.”

밤새 거센 해풍이 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맑은 아침이 시작되었다. 식사를 하고 언덕의 끝까지 산책을 했다. 주말이라 나들이객이 많았다. 너럭바위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는데 상파울루에서 온 여행객이 곁에 앉더니 말을 걸었다. 청년이 입은 민소매 셔츠엔 “아임 낫 퍼펙트, 벗 아임 리미티드 에디션”(나는 완벽하진 않아, 그러나 한정판이지)이란 문장이 씌어 있었다. 처음 그 문구를 본 건 타이였는데 어느새 남아메리카까지 퍼졌구나. 출처는 ‘세실 프랏’이라는데 그 인물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해가 높아질수록 무더워졌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이 해변으로 몰려갔다. “우리도 수영이나 할까?” “좋지!” 수평선을 향해 50미터를 들어가도 허리춤의 깊이,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맑은 물, 수영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실컷 해수욕을 하고 신발을 벗어둔 해변으로 오는데 저만치 앉아 있던 무리가 손짓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니?” “한국에서!” “맥주 한잔 할래?”

브라질 출신은 한명뿐,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와 장기체류 여행자였다. 중년으로 엑스(X)세대의 전형이었다. 제롬은 비행기 조종사라고 했다. 성수기 몇달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휴양지에서 보낸다고 했다. 카밀라는 장기체류형 여행을 하며 요가를 가르친다고 했다. “삶이란, 결국 내가 보낸 시간이잖아. 1년 내내 일하면 10만달러도 벌 수 있겠지만, 일만 하면서 내 시간을 탕진하고 싶지 않아. 오늘처럼 아름다운 햇살이 유혹할 땐 더더욱!” 제롬이 말했다. “일본인은 지독한 일중독자들이었어, 오직 일, 일. 한국인도 그러니?” 한때 일본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알렉스가 내게 물었다. 그들과 대화는 더글러스 코플런드의 소설 〈제너레이션 엑스(X)〉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코플런드는 폴 퍼셀의 사회학서적 〈계급〉에서 ‘엑스’를 가져왔다고 했다. 퍼셀은 지위, 돈, 사회적 상승의 회전목마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하는 이들을 ‘엑스’로 명명했다.

세일링이 취미라고 이야기한 브라질 청소년들. 노동효 제공
플로리파의 바라다라고아 너럭바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노동효 제공

플로리파의 진정한 마법

숯불구이와 샐러드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순식간에 8개들이 두 상자가 비었다. 현호가 한 상자를 사왔다. 그마저 마시고 카밀라가 한 상자를 사왔다. 맥주가 빌 때마다 번갈아 가게를 오가는 사이 빈 캔이 점점 불어났다. “해변의 끝은 어디지?” 까마득한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모잠비크 해변, 이 백사장이 12킬로미터나 이어져. 중간쯤에선 벌거벗고 있어도 돼. 아무도 없거든.” 제롬이 대답했다. “매달 보름달 뜰 때 모잠비크와 바하다라고아 중간쯤에서 풀문 파티가 열려, 양쪽에서 6킬로미터씩 걸어가 만나는 거지! 하하하” 알렉스가 말했다. 마시고 떠들고 노는 사이 해가 기울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 각자 가방 하나씩을 들고, 제롬과 나는 빈 맥주 캔을 담은 봉지를 들었다. 백사장에서 나와 도로에 올라서자 쓰레기통이 보였다. 아직 공간이 남아 있었다. 내가 봉지를 넣으려 하자 제롬이 말했다. “안 돼!” “왜?” “이미 많이 찼어. 바람 불면 쓰레기가 바다로 날아갈지도 모르잖아, 내 차에 싣고 갈게.”

북한산을 내려오던 날이 떠올랐다. 공원관리소 앞에 쓰레기통이 있었다. 가득 차고도 비닐봉지가 계속 쌓였다. 바람이 불었다. 비닐봉지들이 산으로 날아가며 일회용 접시와 사탕 껍질을 뱉어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등산객들도 쓰레기통 아래 비닐봉지를 쌓긴 매한가지였다. ‘일단 난 쓰레기통 옆에 버렸으니까!’ 목적과 방법이 전도된 광경이 여름철 해수욕장에서도 재현되곤 했더랬다.

술을 사양하던 카밀라가 취한 친구들을 태우고 떠났다. 손을 흔들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쾌청한 주말이라 수천명이 해변에서 놀다가 떠났다. 그런데 백사장도, 해안도로도, 차들이 서 있던 공터도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한바탕 인파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아무도 찾지 않은 해변인 듯 말끔한 풍경, 플로리파의 진정한 마법이었다.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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