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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병 시대..희생양 만들기 악순환 반복하나

한겨레 입력 2022. 08. 06. 15:00 수정 2022. 08. 0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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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감염병과 그림
흑사병 휩쓴 유럽서 학살된 유대인
역병의 원인으로 추방된 오이디푸스
일상화된 신종 감염병 위협 속에서
'감정 쓰레기통'만 찾을 것인가
에밀 슈베제르, <1349년 스트라스부르의 학살>, 1894년, 종이에 채색,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국립대학도서관.

사방에 폭력이 가득하다. 그림 오른쪽을 보면 남자들이 노인에게서 빼앗은 금은보화를 궤짝에 담고 있는데, 이를 저지하려는 노인을 한 병사가 모질게 채찍질한다. 가운데엔 기독교 성직자들이 아기에게 강제 세례를 주고 있으며 옆에는 다음 아기가 세례를 위해 대기 중이다. 방금 아기를 빼앗긴 엄마는 되돌려받기 위해 저항하고 있지만, 초록색 옷을 입은 남자가 휘두르는 팔에 곧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뒤에서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사람들이 집단 화형을 당하고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화가 에밀 슈베제르(1837~1903)가 그린 <1349년 스트라스부르의 학살>이다. 1349년 2월14일 당시 독일 땅이었던 스트라스부르에서 주민들이 유대인 2천명을 집단으로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은 사건을 묘사한 그림이다. 비단 스트라스부르뿐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스위스의 바젤, 독일의 쾰른에서도 유대인들은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왜 유대인을 콕 집어서 살육했을까.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유럽이 흑사병으로 초토화 중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조반니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아침에 거리를 지나가면 죽어간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볼 수 있었다. 관이 부족해서 널빤지에 얹어서 들고 가는 일도 흔했다”고 적었을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병이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때 흑사병은 분노한 신이 내린 벌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악한 유대인의 죄 때문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급기야는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거짓 소문도 퍼졌다. 유대인들이 진짜 우물에 독을 탔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이 모든 게 유대인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유

평범한 사람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채 약자에게 마음 놓고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가 기원전 430~420년 사이에 지은 비극 <오이디푸스왕>을 통해 이들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의 화가 샤를 잘라베르(1818~1901)가 그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보자.

샤를 잘라베르,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1842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마르세유 미술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에 역병이 번진 가운데 오이디푸스가 딸인 안티고네의 손을 잡고 테베 밖으로 나가는 중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마치 더러운 것을 대하듯 몸을 움츠리고, 원망과 경멸을 담은 눈길로 흘낏 쳐다볼 뿐이다. 오른쪽의 여성은 방금 아이가 역병으로 희생된 것이 오이디푸스 때문이라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본다. 사실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의 죄 때문에 역병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죄인이었던 것. 오이디푸스 옆에 있는 딸 안티고네는 동시에 그의 동생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오이디푸스가 의도적으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장차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신탁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테베의 왕과 왕비인 부모에게 버림받고,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성장했다. 운명은 오이디푸스를 곱게 놔두지 않았다. 장성한 뒤 어느 날 우연히 친아버지를 거리에서 마주치고, 그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비가 붙어 아버지를 죽이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 뒤 우여곡절 끝에 테베의 왕이 되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결국은 신탁의 내용이 실현된 것이다. 때마침 테베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퍼진다.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구하기 위해 아폴론의 신탁을 구하는데, ‘이 땅으로부터 오염을 내쫓아라. 그것을 더 이상 품지 말라’는 답이 나온다. 이윽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신탁이 말한 ‘오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찌르고, 테베 사람들의 저주를 받으며 추방당한다.

사실 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오이디푸스는 아무에게도 병을 옮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중요하진 않았다. 테베 사람들에게는 그저 병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쏟아부을 ‘감정의 쓰레기통’이 필요했을 뿐이다. 르네 지라르는 저서 <폭력과 성스러움>과 <희생양>에서 이를 ‘희생양 구조’로 설명했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들은 사회에 재난 같은 큰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의 원인을 특정 대상에게 뒤집어씌운다. 사회 전체는 이 대상을 희생시킴으로써 불안정한 사회 상태를 안정화하고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이때 ‘제물’이 되기 제일 쉬운 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보복할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이다. 흑사병이 번졌을 때 일사불란하게 학살당한 유대인처럼 말이다.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역시나 이번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분노와 불안을 쏟아낼 ‘희생양’을 찾는 이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중국의 우한 지역에서 첫 환자가 발생하자, 중국인과 동양인들은 서구에서 ‘네 나라로 가라’고 욕을 먹고 신체적 폭력까지 당하곤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한 폐렴’, ‘중국 바이러스’라고 고집스레 부르며 국내 중국인 동포를 향해 증오심을 내뿜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마치 오이디푸스를 추방한 테베 시민처럼, 중국인만 내쫓으면 우리 사회가 ‘정화’될 거라는 듯 말이다. 이런 혐오와 배제의 감정은 코로나19 유행 초반, 확진자에게까지 옮겨붙었다. 감염의 책임을 개인에게로 돌리며 비난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 코로나19 유행 기간 중 사람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물을 올리며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촬영’, ‘사진 찍을 때만 마스크 내림’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였던 것도, 자신이 비난의 대상이 될까 봐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 아니었을까.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신종 감염병은 앞으로도 인류를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감염병과 사회>의 저자 프랭크 스노든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오히려 감염병이 인류 문명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감염병은 늘 (희생양 찾기 등)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기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의 취약성을 해결하도록 강한 압박을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신종 감염병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순간, 또다시 희생양을 찾는 악순환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인간 사회의 약점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사명을 기꺼이 짊어질 것인가.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이유리_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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