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한겨레 입력 2022. 8. 7. 18:05 수정 2022. 8. 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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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치솟는 물가][세상읽기]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달 2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정권 출범 이래 윤석열 정부의 일관된 정책기조는 ‘성장을 통해 민생’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1990년대부터 성장률 둔화가 불평등의 심화를 동반했으니 생각해볼 수 있는 해법이다. 더욱이 ‘경제는 보수가 잘해’라는 세간의 믿음이 있지 않나. 보수정부의 이런 공언은 고도성장을 통해 부자가 되고 싶은 국민의 욕망을 건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욕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금을 낮추면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는 신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폴 크루그먼이 지적했듯이 보수주의자가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1982~84년 미국 호황은 레이건 정부의 감세정책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급격한 이자율 상승이 만든 인위적 경기침체에 따른 기저효과와 1982년 금리를 급격히 낮춘 금융완화의 결과였다.

더 큰 역설은 레이건 정부가 감세와 함께 경기하강을 막기 위해 부채를 늘려 수요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감세로 부족해진 재정을 부채로 메운 것이다. 아들 부시 정부의 감세정책도 보수의 공언과 달리 경기침체로 이어졌고 마침내 금융위기로 종말을 고했다.

이명박 정부의 감세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율을 25%에서 22%로 낮추고 종합부동산세를 무력화해 기업과 부자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감세는 경제를 살리지도, 민생을 회복시키지도 못했다. 이명박 정부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훨씬 못 미치는 3.2%에 불과했고 감세로 재벌의 사내유보금만 늘려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도 레이건 정부처럼 감세로 부족해진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렸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발행된 국채가 연평균 5.6조원이었던 것에 견줘 이명박 정부는 ‘민주당 정부’의 4배에 가까운 연평균 20조원을 발행했다. ‘증세 없는 복지’를 외친 박근혜 정부는 감세로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려고 증세를 해야만 했다.

사실이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경제 활력을 제고하고 민생 안정’을 위해 또다시 부자와 재벌을 위한 감세를 하겠단다. 당황스러운 일은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 감세정책이 우리 경제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어떤 기준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이 강조하는 ‘글로벌 기준’은 정부가 불평등을 낮추기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제가 장기침체에서 벗어나 지속성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마 장관이 세상 물정 모르고 수십년 전에 유행했던 정책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착각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도 굳이 글로벌 기준에 맞추고 싶다면 왜 노동과 복지는 맞추지 않는지 궁금하다.

대통령이야 본인 말대로 대통령이 처음이고 수사밖에 모르는 정책의 문외한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기재부 장관을 비롯해 ‘실질적’ 결정권을 가진 관료와 전문가는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부자와 대기업의 세금을 낮추면 경제와 민생이 나아진다는 비과학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이들만이 아니다. 국민의힘은 마치 집권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 여당처럼 행동하고 있다.

보수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팬데믹에 이어 인플레이션이 경기를 끌어내리면서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위협하는데, 대책이라며 내놓은 것이 부자에게 훨씬 더 많은 혜택을 주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는 감세라니. 이 정부를 보면 ‘경제는 보수가 잘해’라는 세간의 믿음이 근거가 없는 잘못된 믿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세는 글로벌 기준도 아니며, 인플레이션과 경제위기의 시대에 해야 할 일도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보수의 이념에 맞게 위기에 처한 민생을 보듬는 것이다. 돈이 없다고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라. 국민이 거의 체감할 수 없는 유류세 인하와 계획된 감세만 되돌려도 5년 동안 대략 60조원 이상을 마련할 수 있다. 이 돈으로 보수의 색깔에 맞게 기준중위소득의 현실화 같은 취약계층을 위한 ‘선별적 복지’를 제대로 확대해라. 인플레이션 시대에 꼭 필요한 일이며, 세계경제의 흐름과 기본적 산수만 알아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보수정부의 체면이 있는데 경제와 민생 정책에서 낙제는 면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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