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기록적인 폭우가 드러낸 '불평등의 민낯'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강연주 기자 2022. 8. 10. 17: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폭우가 쏟아진 지난 8일 밤 서울지하철 7호선 이수역이 흘러내린 빗물로 침수되자 청소노동자들이 배수작업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현장 노동자 모두 열차 재운행만 생각했을 거예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죠. 그래도 사람이니까, 이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출근하는데 무섭더라고요.”

지난 8일부터 중부지방에 퍼부은 기록적인 폭우는 수년째 지하철 청소 업무를 하는 A씨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재해였다. A씨는 폭우로 폐쇄됐던 서울 9호선 동작역의 청소 작업에 투입됐다. A씨는 10일 기자와 만나 “플랫폼 곳곳이 모래나 진흙으로 빼곡했다. 모래를 하나하나 퍼 올린 뒤에 전부 닦아내야 했는데, 승강기나 에스컬레이터가 중단된 상황에 이 작업을 하는게 정말 고됐다”고 말했다.

7호선 이수역 청소노동자 B씨도 상황은 같았다. 이수역은 8일 폭우로 빗물이 들어차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B씨는 이날 “(지난 8일)지하철 계단 등에서 물이 막 폭포수처럼 내려오는 게 보이더라. 물길을 막고는 싶었지만 쓸려 내려갈 것만 같았다”며 “그런데도 그때는 위험한 줄도 모르고 일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까 침수지역 곳곳에 전기 설비가 참 많았다”고 했다. 자칫 감전 사고로 번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B씨는 “연일 강행군으로 일하다보니, 언니들(청소노동자) 얼굴이 다들 붓고,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있다”고 했다.

폭우로 인한 침수 피해를 입은 서울 동장구 남성사계시장에서 10일 서울시새마을회원들과 환경미화원, 상인들이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기록적인 폭우가 휩쓸고 간 자리엔 흙과 쓰레기만 남은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 ‘재난 불평등’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침수로 인한 피해도, 이를 복구하기 위해 부담해야 할 짐도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이번 재난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지하철역을 지킨 건 평균 연령 60대의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이찬배 민주여성노조 위원장은 “재난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일한다”며 “모든 현장 업무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길 게 아니라, 정부가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적인 대응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각자도생식’ 복구작업에 진땀을 흘리는 곳은 또 있다. 이날 오전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서는 구청 직원들과 군인들이 수습작업에 구슬땀을 흘렸다. 그러나 상인들은 “공무 인력이 늦어도 한참 늦었다”고 했다. 상인들은 인력을 직접 고용하거나 가족 등 지인을 총동원해 전날부터 수습에 나섰다는 것이다. 오전 10시20분쯤 ‘수해 피해를 입은 상인 중 필요한 곳에는 인력을 더 보내주겠다’는 안내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한 상인은 “이제 보내주면 뭐 하냐. 우리가 사람 고용해서 다 치웠는데”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10일 오전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 골목 노래방이 폭우로 인해 완전히 잠겨있다. 강연주 기자

코로나19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은 상인들은 침수로 폐허가 된 가게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남성사계시장 골목에서 4년째 노래방을 운영하는 김광현씨(56)는 “다 끝났다”는 말을 반복했다. 적자를 메우려고 살던 아파트까지 팔아 유지한 노래방이었다. 건물 지하 1층에 있는 가게 내부에는 이날 오전까지도 성인 남성 발목을 넘길 정도의 물이 차 있었다. 김씨는 “코로나19 때 장사를 하지도 못하다 이제야 좀 영업을 하려니 물벼락을 맞은 것”이라며 “이제는 정말 답이 안 나온다. 어제부터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있다. 기계가 모두 망가져 복구비용이 1억5000만원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장사는 더 못한다고 본다”고 했다. 상인들은 재난지역으로 선포되지 않는 이상 보상금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기록적인 폭우·폭염의 근본 원인으로 기후위기가 지목된다. 이번 폭우는 기후위기와 기후재난의 피해가 취약계층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반지하 거주자 등 주거약자를 중심으로 큰 피해가 발생한 이번 폭우처럼 폭염도 사회적 약자를 먼저 덮친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이 발간한 ‘2020 폭염영향보고서’를 보면 2018년 기준 고소득층(건강보험료 상위 20%)의 온열질환 발병률은 1만명당 7.4명인 반면 저소득층에 해당하는 의료급여수급자는 21.2명이 온열질환을 앓았다. 약 3배에 이르는 수치다.

지난 8일 밤 내린 폭우로 발달장애인 등 일가족 3명이 집안에 고립돼 사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 다세대주택의 반지하층이 9일 물에 잠겨 있다. 박하얀 기자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주택 일가족 참사 이면엔 발달장애인 언니와 어린 자녀를 돌보는 하청 노동자의 삶이 있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서비스연맹이 공개한 부고에 따르면, 이 사고로 숨진 홍모씨는 면세점 협력업체 소속 현장 판매직 노동자이다. 연맹은 “홍씨는 노동자가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훌륭한 활동가였다”고 추모했다.

이영경 에너지정의행동 사무국장은 “이번 폭우는 기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따른 피해가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냈다”며 “기후재난이 거듭될수록 취약계층의 피해는 커질 것이다. 기후위기 이면에 숨겨진 불평등 문제를 직시해야만 실효성 있는 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희원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간사는 “국가재정이란 결국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안전망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인데, 정부는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국가지원을 계속해서 축소하고 있다”며 “재난으로부터 사회적 약자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국가의 존재 이유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강연주 기자 play@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