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국민을 향해 닫아건 門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2. 8. 17. 03:02 수정 2023. 11. 2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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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끊긴 창경궁과 종묘
12년 공사해 다시 연결했지만
둘 사이를 잇는 북신문은 닫혀
克日 상징으로 열고 기념해야
일제가 단절시켰던 창경궁과 종묘의 연결통로를 시민들에게 개방한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경궁-종묘 연결 현장 내 북신문 앞에서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뉴시스

창덕궁과 창경궁은 원래 동궐(東闕)로 불리던 한 공간이었다.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창경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었다. 일제 때 종묘 관통 도로(현 율곡로)가 나면서 두 동강 났던 것을 오세훈 서울시장이 복원 공사를 시작해 지난 7월 마무리했다. 12년 걸렸고 세금 1000억여 원이 투입됐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율곡로를 지하에 넣었고 그 위에 일제가 허물었던 종묘 담장을 되살렸다. 북신문(北神門) 복원은 이 모든 과정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그 문을 통과해야 창경궁과 종묘를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써 다시 세운 이 문은 지금 굳게 닫혀 있다. 지난달 21일 ‘창경궁 종묘 연결 복원 사업 시민 개방 행사’ 때 잠시 열렸을 뿐이다. 시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 주말에 현장을 찾아가 만나봤다. 대부분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해 놓고 문을 닫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이었다. “복원 소식을 듣고 일산에서 왔다”는 부부는 “연계 관람이 되는 줄 알고 창경궁에서 매표해 북신문 앞까지 왔는데 종묘로 넘어갈 수 없다니 속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들과 헤어져 종묘에 들어가 봤다. 북신문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 한 장 없었다. 북신문 앞은 더 기가 막혔다. 문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줄로 막아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출입금지’라는 팻말까지 걸어 놨다.

옛 모습을 되살린다고 다 복원이 아니다. 원래 기능까지 되살려야 진짜 복원이다. 일본 교토에 있는 니조성 마루는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자객의 침입을 알아채기 위한 설계라고 한다. 그곳을 찾는 관광객은 눈으로만 보지 않고 마루 위를 걸으며 자기 귀로 확인한다. 복원이 의미를 지니려면 이처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창경궁은 자유관람이지만 종묘는 시간제 관람이어서 북신문을 통과하는 연계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화재 당국 설명이다. 그러나 입장 인원과 횟수를 제한했던 창덕궁도 국민 요구에 따라 자유관람으로 전환한 전례가 있다. 지금은 창덕궁으로 들어가든 창경궁으로 입장하든 함양문에서 추가 관람료만 내면 두 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북신문이 그 전례를 따르지 못할 이유가 뭔가. 종묘도 주말에는 창경궁처럼 자유관람제로 운영되니 주말 개방부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가 종묘 관통 도로를 내며 담장을 훼손했을 때 비판 여론이 크게 일었다. 서슬 퍼런 그들조차 둘 사이를 아주 끊지는 않겠다며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육교를 놓아 민심을 달랬다. 그런데 우리는 옛 모습 복원한다며 그 육교를 허물더니 막상 되살린 북신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종묘 입구에 ‘상호 통행일 미정’이란 안내판을 내걸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세금 1000억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애써 복원한 만큼 시민의 관심을 환기하는 게 세금 쓴 보람을 찾는 길이다. 대대적으로 홍보해도 모자랄 판에 문을 꼭꼭 닫아걸고 어떻게 시민이 관심 갖기를 바라겠는가. 12년 공사하는 사이 관람 시스템을 개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놀랍다. 심지어 문화재청 내년 예산에 북신문 개방에 따른 매표 인력 충원 계획조차 잡혀 있지 않다.

광복 이후 우리는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았고 일부에선 넘어서고 있다. 지난 70여 년 극일(克日)을 위해 땀 흘린 결과다. 창경궁과 종묘를 다시 잇고 북신문을 세운 것은 그 눈부신 성취를 자축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제가 8·15였다. 그날 북신문을 열고 축하 행사를 했다면 어땠을까.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지금이라도 북신문 개방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내년 8·15 때는 활짝 열린 북신문 앞에서 광복과 건국, 이후 우리가 이룬 도약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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