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희의 환경칼럼] 둑 일부러 작게 터서 큰 홍수 막기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2022. 8. 17.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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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서유럽 대홍수 때 ‘사망자 제로’였던 네덜란드
홍수 때 강물 빼내는 우회 수로 곳곳 조성
난폭해진 강물은 흐를 공간 줘 달래야
간밤 폭우 등으로 인해 한강 수위가 급격히 상승한 9일 오전 서울 63스퀘어에서 바라본 여의도 한강공원 일대와 한강의 모습. /연합뉴스

기온이 오르면 바다에서 수증기가 많이 생긴다. 대기가 머금을 수 있는 수증기 양도 증가한다. 따라서 기후변화가 진행될수록 폭우는 더 격렬해진다. 폭우가 쏟아지면 지난주 서울 물난리 같은 도시 내 침수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강물이 제방을 넘거나 아예 제방이 파손되는 사태다. 이걸 막으려면 강바닥을 더 파거나 제방을 더 높게 쌓아야 한다. 물이 흘러가는 통수(通水) 면적을 키워 홍수 유량이 빨리 바다로 빠져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 구조물로 자연의 힘을 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제방을 더 높게 쌓고 싶어도 기존 교량 위치 때문에 불가능하다. 이럴 때 발상을 바꿔야 한다. 둑을 일부러 작게 터서 큰 홍수를 막는 것이다.

작년 7월 중순 서유럽 폭우로 독일·벨기에에서 239명 인명 피해가 났다. 선진국 홍수 피해로는 재앙적 수준이었다. 서유럽 홍수 직후 환경칼럼에서 네덜란드는 독일·벨기에와 라인·마스 두 강을 공유하고 있는데도 희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네덜란드가 2007년부터 10년간 진행한 ‘강에 여유 주기(Room for the River)’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강바닥을 파고, 강폭을 넓히고, 제방을 보강했다. 우리의 4대강 사업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목적의 치수(治水) 사업이 있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칼럼이 나간 한 달 뒤에 뉴욕타임스가 네덜란드 치수 사업을 조명하는 르포 기사를 썼다. ‘홍수를 피하려면 흐름과 같이 가야’라는 제목이었다. 읽어 보니 필자가 놓쳤던 부분을 짚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강에 여유 주기’를 통해 기막힌 홍수 방어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었다. 제방과 제방 안쪽 구조를 강화하는 것 외에 홍수 유량의 일부를 제방 바깥쪽으로 빼내 피크 홍수 때의 수압을 낮추는 방법이다. 압력 밥솥의 뚜껑 꼭지를 살짝 젖혀 증기를 빼내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뉴욕타임스는 마스강 제방 바깥쪽에 조성한 526만㎡(약 160만평) 규모 홍수 터를 주목했다. 구불구불하던 강을 정비하면서 과거 물길이었던 습지가 농지로 바뀌었는데, 그곳에 우회 수로를 조성했다. 작년 여름 홍수가 극한 수준에 다다랐을 때 강물을 그곳 우회 수로로 빼내 마스강 본류 수위를 33㎝ 낮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인근 도시 두 곳이 침수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 우회 수로는 평소엔 습지 생태 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네덜란드 에이설강의 예비수로 개념도. 맨 왼쪽은 평소 물 흐름. 가운데는 홍수시 상황. 맨 오른쪽은 예비수로가 홍수 유량을 분담한 모습. 예비수로는 평소엔 목초지로 활용한다.

자료를 더 뒤져봤다. ‘강에 여유 주기’의 마지막 프로젝트로 2017년 완성한 것이 라인강 지류인 에이설강의 8㎞ 길이 예비 수로다. 평소엔 목초지로 쓰다가 홍수 때 제방 수문을 열어 강물을 빼내 저류한다. 본류의 홍수량을 일시적으로 분담케 해 수위를 71㎝까지 떨어뜨리면서 홍수 에너지에서 김을 빼내는 것이다. 홍수가 끝난 뒤엔 하류 쪽 배수 펌프로 물을 본류로 퍼낸다. 본류와 수위 차가 유지된다면 물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중력 배수도 가능할 것이다. 예비 수로 부지에는 원래 주택이 9채 있었는데 주민들을 설득해 이주시켰다고 한다.

우리도 강바닥을 파고 제방을 높이 쌓아 강물을 통제해왔다. 구불구불 흐르던 하천을 곧게 펴면서 제방 바깥쪽에 폐천(廢川) 부지가 생겼고, 그곳은 논으로 조성하거나 자연 습지가 돼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곳을 홍수 때 일시적 우회 수로, 또는 천변 저류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난폭해진 강물을 제방으로 가둬 제압하는 건 쉽지 않으니 강물에 흐를 공간을 여분으로 만들어 줘 달래자는 것이다.

지형을 잘 조사하면 인구 밀집지, 또는 상습 침수 지역의 상류 쪽에 비상시 천변 저류지로 활용할 후보지가 있을 것이다. 대개는 논으로 쓰고 있을 것 같다. 극한 홍수는 10년, 20년에 한 번 있는 일이다. 벼농사를 짓고 있다면 하루 이틀쯤 물에 잠겨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일시적 침수로 소출이 줄더라도 피해액을 훨씬 웃돌게 배상해주면 정부와 주민에게 윈윈이 된다. 놀고 있는 땅이라면 정부가 사들여 생태 습지를 조성할 수도 있다. 당연히 거주지가 아닌 곳을 골라야 하겠지만, 침수 예상지에 드문드문 주택이 있더라도 넉넉한 보상과 함께 부근 고지대로 이주시킬 수 있을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도 주민 설득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름 한 철에 강수량이 집중되는 데다 산악 지형이어서 폭우 때는 거센 급류 하천을 이룬다. 기후 붕괴 시대엔 아무리 튼튼한 제방을 쌓아도 예상을 뛰어넘는 홍수가 발생할 수 있다. 극한 홍수 위협에 대처하려면 ‘한 방울도 안 새게 관리한다’는 발상만 갖고는 부족하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60%가 홍수 위험 지대인 나라다. 홍수와 함께 살아오면서 쌓아온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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