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쪽의 재난[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twitter.com/flatflat38 입력 2022. 8. 17. 14:23 수정 2022. 8. 17.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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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 집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는 걸 보며 대통령은 퇴근했다. 재난은 아래쪽의 문제였을 뿐이다. 침수로 사람이 목숨을 잃은 집 앞에서 반지하 방을 내려다보던 사진만큼 솔직한 고백이 있을까. 그는 아래쪽의 재난을 구경하는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폭우와 함께 재난불평등이 드러나고 있다. 가난할수록 재해에 더 잦게 노출되고 더 크게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다. 장애인, 아동, 노인 등 재난에서 더 취약한 집단이 있다는 사실도 재난 대응 정책의 서두에 곧잘 언급된다. 이번에는 반지하가 주목을 받았다. 그 도시의 시장은 반지하 주택을 없애나가겠다고 했다. 그 나라의 장관은 “그분들은 어디로 가나” 물으며 반지하 거주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아무도 아래쪽 사람들에게 묻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

11일 서울 관악구 침수 피해를 입은 반지하 주택 내부에서 바라본 방범창 앞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지난 8일 집중호우로 이 주택에서 발달장애 가족 3명이 사망했다. 성동훈 기자

재난불평등에서 피해의 격차만큼 중요한 회복의 격차는 잘 조명되지 않는다. 재난에서 회복하는 과정에는 사회적 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원하고 획득할 수 있는 자원도, 회복을 돕고 지지할 관계망도 불평등의 구조를 따라 차이가 난다. 아래쪽의 회복은 더디고 무겁다. 아래쪽 사람들은 공론장에 등장하기도 어렵다. 피해가 잊히는 순간 정치적으로도 잊힌다. 재난 대응 자체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재난 대응 정책에서도 취약성의 조건을 바꾸는 일은 뒤로 밀린다.

취약성은 신체적·물리적 조건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자연재해 사망자는 여성이 많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남녀 사망률의 격차가 작아진다. 차별받는 집단일수록 빈곤과 사회적 배제에 처하기 쉽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더 위험한 곳에 살게 되는데 정보를 전달받거나 구조받기는 더 어렵다. 여성이 누군가 돌보는 일을 많이 맡다 보니 마지막까지 탈출하기 어렵다는 점도 사망률 격차를 설명한다. 이달 초 투석전문병원 화재로 숨진 간호사를 떠올려봐도 된다. 장애인, 아동, 노인이 재난에 취약한 이유도 복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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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는 젠더불평등을 확연히 드러냈다. 재난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에도 격차가 있다. 여성은 일자리를 잃기 더 쉬웠다. 노동권 보장이 취약한 일자리에 있었거나, 공적 돌봄의 중단으로 돌봄 부담을 떠안게 되었거나, 타인을 돌보는 대면 노동이 중단되거나 하는 등의 이유다. 그러나 갱신을 거듭하는 코로나19 대응책에는 젠더의 관점이 담기지 않고, 피해의 회복은 여성 개인들에게 떠넘겨졌다. 여성의 일할 권리와 쉴 권리도, 돌봄의 공공성이나 책임 분배도 논의되지 않는다. 회복의 격차는 불평등 구조를 강화하고 고스란히 피해의 격차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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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겪는 와중에 폭우가 쏟아진 것처럼, 재난은 회복을 기다려 찾아오지 않는다. 기후위기 시대, 재난은 더욱 가쁘게 밀려올 것이다. 아래쪽 사람들은 더 아래쪽으로 밀려나고, 아래쪽의 재난은 더 참혹해지지만 잠깐의 구경거리가 되고 만다. 불평등은 재난의 수식어가 아니라 본질이다. 아래쪽의 재난을 두고 위쪽에서 갑론을박하게 둘수록 재난이 반복된다. 재난 대응과 회복은 평등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재난불평등을 마주하는 시간은 두 갈래로 흐를 수 있다. 우리가 취약한 집단에 속해 있음을 절망스럽게 확인하며 숨어드는 시간,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 세계에 맞설 계기를 발견하며 모여드는 시간. 우리는 어떤 시간을 바라는가.

대통령이 구경하던 아래쪽 집에는 네 명의 여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동시에 노동자였고 어린이였고 노인이었고 장애인이었다. 주로 돌보는 사람, 서로 돌보는 관계, 일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저항. 그곳에는 피해의 굴레이기도 한 취약성을 연대로 빚어 재난 이후의 세계를 틔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의 애도는 비탄에서 멈출 수 없다. 평등을 향한 아래쪽 사람들의 정치를 만들어가는 일이 애도이자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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