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혼란 중에 살아남기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입력 2022. 8. 2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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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와 폭염이 반복되는 날씨에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100여개의 크고 작은 축제가 꿋꿋이 ‘현재진행 중’이다. 수년간 행사를 준비해온 분들의 입장에서 코로나가 겨우 지나가나 싶은 때에 마주한 이 상황이 얼마나 짓궂게 느껴질지. 올여름 기후의 변화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일이라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을 맞이한 유럽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서 열리는 오페라 축제 ‘브레겐처 페스트슈필레’도 손꼽히는 여름 행사 중 하나다. 이 축제는 호수 위에 무대를 띄워 야외 공연을 올리는데, 올해는 유독 잦은 비 때문에 프리미어 행사부터 취소되는 곤욕을 겪었다. 그 후에도 잦은 천둥 번개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공연이 취소되었다. 그래서인지 한 회 한 회 귀하게 올린 공연이 끝날 때마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축제가 시작되면 브레겐츠 전체가 들썩인다. 이 소도시의 인구는 2만명이지만 축제 기간에는 인구의 10배인 20만명이 브레겐츠를 찾는다. 보덴 호수를 낀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장으로 오는 배를 띄우므로, 주변 도시들도 덩달아 관광 수익을 올린다. 오페라 공연이지만 자유로운 분위기로 얇은 패딩을 입은 사람도 눈에 띈다. 공연 총감독이 말한 행사의 방향성은 재미라고 했으니 누구든 어떤 차림으로든 와서 즐기고 가면 되는 것이다.

이 축제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첫 번째 이유로 늘 입지적 요소가 꼽힌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국경을 낀 거대 호수가 만든 배경 그대로를 무대로 활용하는 상상력이 매번 돋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창조적 연출력이 번뜩이는 수준 높은 공연이야말로 매년 사람들을 호숫가로 불러오는 결정적 이유가 아닐까 싶다. 혁신적인 무대와 인상적인 연출을 선보이겠다는 수년 동안의 의지가 지금 브레겐츠 오페라 축제의 색깔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겪은 혼란 후에 올린 2022년, 2023년의 레퍼토리는 자코모 푸치니의 <마담 버터플라이>다. 100년 전 유럽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편견이 얼마간 공연장 찾는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그렇게 마음먹어서는 어떤 종류의 경험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비싸지 않은 표를 끊었다. 야외 공연장을 가득 메운 7000여명의 청중 앞으로 일본어가 쓰인 얇은 종이 한 장이 무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부서지기도 깨지기도 쉬운 사람의 마음, 조각조각 찢긴 주인공 초초상의 심정을 무대로 표현하면 저렇겠구나 싶었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실내 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단원들의 모습은 객석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방영된다. 공연은 노을이 호수를 붉게 물들이는 즈음에 시작한다. 공연이 끝나고 고개를 들면 무대 위로 어둠에 별이 가득 떠 있다.

브레겐츠는 이 오페라 축제 하나로 국제적인 축제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축제는 오스트리아와 브레겐츠시의 지원을 받지만 오스트리아나 브레겐츠를 홍보하거나 기념하는 자리는 없다.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무대라면 무엇이든, 이미 유명한 무대라면 새롭고 흥미로운 볼거리를 만들어 올린다. 관객과 호흡하는 참신한 공연을 만들기 위해 작품 선정부터 연출 방법까지 관계자들이 수년간 머리를 맞댄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브레겐츠가 알려진 결정적 계기 역시 이 오페라 축제를 통해서였다.

한 해 예산 2700만유로, 한화 358억원에 달하는 브레겐츠 축제는 운영을 위한 상설 사무국이 있다. 사무국 외에도 축제 홍보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돕는 협회가 있고, 1000여명의 국내외 후원자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등 운영 거버넌스가 탄탄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혹독한 시기, 선상에 배를 띄워 올린 무대가 시작이었다는 이 오페라 축제는 어려운 시절 인간을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축제가 탄탄한 국제 행사로 발전하는 데에 국가와 민간의 수준 높은 도움이 있었다는 점을 되짚어보고 싶다.

축제는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우리나라 지역축제 수는 한 해 1000개가 넘는다. 그 축제들 중에는 문화를 사랑하는 기획자와 창작자들이 힘겹게 자생시키는 좋은 축제도 많다. 좋은 축제를 발굴해 수준 있는 문화 프로그램으로 성장시켜 우리 국민뿐 아니라 세계인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은 한국 문화 수준을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정애 전남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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