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버 72년 역사의 아이콘, 디펜더

조회수 2020. 9. 23. 15: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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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 디펜더(좌)와 시리즈 Ⅰ

디펜더는 1948년 출발한 랜드로버 역사의 산증인이자 살아있는 화석이다. 뿌리는 랜드로버 시리즈Ⅰ과 맞닿아 있다. 1970년대 랜드로버가 막을 올린 고급화 전략의 대척점에서 기존 시리즈의 정체성 이을 역할을 짊어진 채 변화와 동 떨어진 길을 걸었다. 1990년 디펜더란 이름을 얻었고, 2016년 1월 임무를 마치고 잠시 사라졌다가 지난해 신형으로 부활했다.

글 김기범 편집장( ceo@roadtest.kr)
사진 랜드로버

Defender Celebration Event Overview (영상 캡처)

새 만남 예고한 마지막 순간

성대하게 기념할 만했다. 지난 68년 세월의 마침표라면. 2016년 1월 29일, 랜드로버가 영국 남부 솔리헐 공장에서 아주 특별한 행사를 치렀다. 기존 세대의 마지막 디펜더 만드는 날이었다. 랜드로버는 생산라인의 행사장으로, 전현직 직원 700여 명을 초대했다. 이들은 라인을 따라 걸으며 솔리헐 누적 200만 대 생산의 마지막 작품 완성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긴장과 설렘, 기대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당시 CEO 랄프 스페스 박사가 말문을 열었다. “70여 년 전, 모리스와 스펜서 윌크스 형제는 웨일즈의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막대기로 쓱쓱 자동차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세월이 흘러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초기 랜드로버의 25차종이 순서대로 등장해 생산라인을 ‘런웨이’ 삼아 지나갔다.

Defender Celebration Event Overview (영상 캡처)

드디어 직원들의 박수갈채 쏟아지는 가운데 최후의 디펜더가 등장했다. ‘그래스미어 그린’으로 칠하고 직물 지붕과 가느다란 와이퍼, 스틸 휠, 옛 그릴과 엠블럼 등 빈티지풍으로 회귀한 ‘디펜더 90 헤리티지 소프트 톱’이었다. 랜드로버는 이 마지막 디펜더를 “컬렉션으로 옮겨 보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끝은 새로운 시작과 맞닿아 더 의미 있었다.

이후 솔리헐의 디펜더 생산라인은 과거 랜드로버 시리즈의 복원을 책임질 공간으로 거듭났다. 랜드로버는 이 프로그램에 기존 라인에서 일하던 10명을 포함 총 12명의 전문가를 투입했다. 이들의 경력을 합치면 무려 172년에 달한다. “이제 클래식 랜드로버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의 일부이기도 해요.” ‘재규어랜드로버 헤리티지’의 디렉터, 팀 해닉의 말이다.

디펜더는 영국인의 추억 속에 다양한 기억으로 남은 존재다. 직원 가족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10대 때 견습생으로 들어와 40년 간 몸담은 팀 비커튼이 좋은 예다. 그의 딸과 아들도 랜드로버 직원이다. 한편, 이날 25대의 빈티지 랜드로버는 공장을 빠져나와 기념 주행을 펼쳤다. 무대는 당연히, 빗물에 흠뻑 젖은 진창길이었다.

1904 로버 8

위기에서 로버를 구한 형제

랜드로버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주역은 로버다. 절반이 겹치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랜드로버는 로버의 계열 브랜드였다. 로버의 뿌리는 자전거 회사. 1878년 존 캠프 스탈리와 윌리엄 서튼이 영국 코벤트리에서 창업했다. 당시 일반적이던 ‘트라이시클’과 달리 두 개의 바퀴만 달았다. 1890년 스탈리는 회사 이름을 ‘로버 사이클 컴퍼니’로 바꿨다.

1901년, 스탈리가 눈을 감았다. 3년 후 회사는 첫 차 ‘로버 8’을 선보였고, 2년 뒤엔 아예 자동차 회사로 거듭났다. 당시엔 흔한 사례였다. 솜씨 빼어난 엔지니어나 수완 좋은 제조사 입장에서, 자동차는 가능성 무궁무진한 사업 아이템. 1929년 로버는 힐만에서 스펜서 윌킨스를 치프 엔지니어로 영입했다. 견습생이던 동생 모리스 윌크스 이듬해 합류했다.

솔리헐 공장에서 차를 생산하는 모습

윌킨스 형제의 등장 이후 로버는 ‘구조조정’과 ‘제품 고급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본격적인 도약기에 들어섰다. 그 즈음 2차 대전이 터졌다. 제조업체에게 전쟁은 ‘재앙’이 아닌, ‘기회’였다. 로버도 발 빠르게 군수물자 제조업체로 변신했다. 2만1,000여 명을 충원해 비행기와 탱크 엔진, 비행기 날개 등을 생산했다. 몰래 자동차용 가스터빈 엔진도 개발했다.

1945년 독일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패전국의 군수 공장은 융단폭격으로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승전국 시설은 무사한 곳이 많았다. 다행히 로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기뻐할 일만은 아니었다. 확장한 생산시설은 덩그러니 남았는데 경기는 바닥을 쳤으니까. 로버는 아쉬운 대로 버밍엄 근교 솔리헐의 군수 공장을 자동차 생산시설로 개조했다.

로버는 전쟁 이전 제품을 그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워낙 저렴하게 팔아 수익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박리다매’는 로버의 전신 중 하나를 창업한 허버트 오스틴의 신념. 훗날 회사를 파산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미니 또한 이 같은 전략의 산물이었다. 로버의 운명에 다시금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윌크스 형제는 로버를 두 번째 위기에서 또 다시 건져낸다.

1947 프로토타입 - 스티어링 휠을 중앙에 놓았다

지프 기본으로 만든 다목적차

1946년 어느 날, 스펜서와 모리스 윌크스 형제는 영국 북해 해안 앵글시 섬의 농장에서 미군이 놓고 간 지프를 몰고 있었다. 지프는 험로주행성능은 뛰어나되 농업용으로 쓰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윌크스 형제는 농사일에도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차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모래톱에 막대기로 그려 결심을 굳힌 지 일 년 만에 프로토타입(시제작차)을 완성했다.

지프를 밑바탕 삼되 섀시를 변형해 썼다. 가령 휠베이스는 그대로 둔 채 뒤 차축엔 로버의 서스펜션을 끼웠다. 그 결과 너비가 늘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스티어링 휠과 시트를 중앙에 놓았다. 운전석이 한 복판에 있으니 농삿일할 때 몰면서 주변을 살피기 좋았다. 뿐만 아니라 우측통행 하는 나라에도 그대로 수출할 수 있었다.

1948 시리즈 Ⅰ

굳이 인테리어라고 할 건 없었다. 도어와 환기장치조차 나중에 옵션으로 마련했을 정도였다. 차체는 알루미늄 합금이었다. 전쟁 직후라 쇠붙이가 귀해 고른 차선책이었다. 제조원가는 비쌌지만 가벼운 데다 녹이 슬지 않았다. 엔진은 로버제로 프로토타입 땐 1.4L였는데, 양산차는 1.6L를 얹었다. 55마력의 힘은 수동 4단 변속기를 통해 네 바퀴에 전했다.

스페어타이어는 보닛 위에 얹었다. 짐칸을 조금이라도 더 넓게 쓰기 위한 묘안이었다. 생산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곡면은 최대한 줄였다. 당시만 해도 수작업으로 패널을 꺾어 보디를 만들었다. 오늘날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칭송받는, 초기 랜드로버의 반듯한 모습엔 이런 사정이 있었다. 프로토타입과 달리 스티어링 휠은 오른쪽에 달았고 3명이 탈 수 있었다.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모터쇼에서 양산차, 시리즈Ⅰ이 베일을 벗었다. 랜드로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랜드로버 시리즈Ⅰ은 솔리헐 공장에서 생산했다. 데뷔 채 일 년이 되지 않아 시리즈Ⅰ은 로버보다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험로를 거뜬히 달리는 데다, 고치기 쉽고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어 농부에게 사랑받았다. 윌크스 형제의 의도는 적중했다.

1946 시리즈 Ⅰ - 휠베이스가 107인치다

1948~1985년 주름잡은 시리즈

랜드로버 시리즈Ⅰ이 뜨거운 사랑을 받으면서 크고 작은 변화도 속속 스며 들었다. 시나브로 자동차다운 인테리어를 갖추기 시작했다. 4L(4륜 저속)·4H(사륜 고속)·2H(후륜)로 굴림방식 바꾸는 기능도 담았다. 1952년엔 배기량을 1,978㏄로 키워 주행성능을 더욱 높였다. 이듬해엔 휠베이스를 6인치 늘려 짐 공간을 25% 확장한 86인치 모델도 선보였다.

1954년에는 휠베이스 107인치의 픽업을 내놨다. 86인치 모델은 7명, 107인치 모델은 10명을 태울 수 있었다. 1956년 107인치 픽업은 왜건으로 진화했다. 휠베이스를 늘이고 2,052㏄ 엔진 얹은 88인치와 109인치 모델도 선보였다. 1957년엔 랜드로버 최초로 2.0L 디젤 엔진을 얹었다. 데뷔 10주년을 맞은 1958년, 시리즈Ⅰ은 시리즈Ⅱ로 거듭났다.

1965 시리즈 Ⅱ 를 기반으로 한 소방차


시리즈 Ⅲ

시리즈Ⅱ는 로버의 디자이너 D. 베크가 설계했다. 배기량은 이제 2,286cc로 키웠다. 시리즈Ⅱ의 등장과 더불어 랜드로버의 인기는 가파르게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데뷔 11년 만에 25만 대를 넘어섰고, 1966년에는 50만 대, 76년엔 100만 대 생산을 돌파했다. 당시만 해도 오프로드용 자동차가 단일 차종으로 100만 대 이상 팔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1958년 시리즈Ⅱ는 1980년대 중반까지 쓰던 디젤을 포함해 새로운 디자인과 엔진 업데이트를 거쳤다. 판매량은 1966년 50만 대에 이르렀고, 연간 생산량은 1971년 5만6,000대로 정점을 찍었다. 1971년엔 시리즈Ⅲ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라디에이터 그릴 소재를 금속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1~4단 기어 모두에 싱크로매시를 갖추는 등 개선을 거쳤다.

시리즈Ⅲ는 1985년까지 총 40만 대를 생산한 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랜드로버 시리즈는 데뷔 이후 단종할 때까지 오랜 세월 비슷한 외모로 명맥을 이었다. 거우듬하게 부푼 좌우 펜더 사이로 쏙 들어간 ‘얼굴’이 대표적이다. 그래도 미묘한 차이는 있다. 이를테면 시리즈Ⅱ는 그릴 위로 헤드램프를 돌출시켰고, 시리즈Ⅲ 후기형은 좌우 펜더로 옮겼다.

1988 랜드로버 90

번호 대신 얻은 새 이름, 디펜더

1983년, 시리즈Ⅲ이 라인업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후속이 나왔다. 이제 이름에서 시리즈를 빼고 휠베이스(인치)로만 모델을 구분했다. 랜드로버 90과 110, 127(나중엔 130)이 주인공이었다. 펜더 사이로 움푹 들어갔던 그릴을 이제 앞으로 바짝 당기면서 얼굴이 평평해졌다. 1990년, 랜드로버는 새 이름과 휠베이스 길이로 구분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바로 디펜더였다. ‘수비수’란 뜻의 이름처럼, 시리즈Ⅰ으로 싹을 틔운 랜드로버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킬 책임을 짊어졌다. 여기엔 사정이 있었다. 랜드로버는 꾸준히 고급화를 추진해 1960년대 중반 이후 레저용 차로 변신에 성공한다. 그럼에도 로버는 걱정이 많았다. 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지면서 랜드로버의 수요가 점차 사그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9 디스커버리

위기의식에 휩싸인 랜드로버는 발 빠르게 시장 조사에 나선다. 그 결과 랜드로버는 보다 고급스러우면서 도시에 어울리는 오프로더를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소위 ‘신분상승’ 프로젝트는 1970년 레인지로버와 1989년 디스커버리로 결실을 맺었다. 반면 디펜더는 변화를 거부한 채 자리를 지켰다. 두 형의 출세를 위해 조용히 고향에서 뒷바라지 하는 동생처럼.

물론 외모 변화가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내용은 꾸준히 업데이트했다. 가령 1998년 Td5엔진과 주행 관련 전자장비를 도입했다. 튼실한 아날로그 기본기를 디지털 양념으로 보완하면서, 디펜더의 오프로드 주행성능은 일취월장했다. 이후 유럽의 배기가스 규정에 맞춰 엔진을 바꿔왔다. 가령 2011년 배기량을 200㏄ 줄였지만 출력과 토크는 고스란히 유지했다.

디펜더 역사

지난 68년 동안 시리즈Ⅰ~Ⅲ, 디펜더는 다양한 활약을 통해 랜드로버를 널리 알렸다. 1949년 영국군은 시리즈Ⅰ 1,878대를 군용차로 주문했는데, 그 중 일부는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또한, 카멜 트로피와 G4 챌린지 등 극한의 험로 이벤트를 통해 압도적 성능을 입증했다. 이제 디펜더는 4년여의 휴식을 마치고, 신형으로 돌아와 새로운 역사를 쓸 참이다.

(다음 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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