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밥 대신 초코파이.. 하루 15시간 중노동"

김판,이현우 입력 2020. 10. 9. 04:00 수정 2020. 10. 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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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개야도 '노예의 삶' 동티모르인
강은미 정의당 의원 "인신매매 수준, 있을 수 없는 일" 질타
동티모르 출신 이주노동자 코레이아 아폴리나리오씨가 8일 국회에서 열린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 출석해 전북 군산 앞바다 섬 개야도에서 노예처럼 지내다 탈출한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가까스로 ‘섬 노예’에서 탈출한 동티모르 국적의 아폴리(본명 코레이아 아폴리나리오·33)씨가 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장 마이크 앞에 섰다. 그토록 만나고 싶던 고용부 고위 간부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열악한 근로조건에 대해 항의하러 노동부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사업주의 반대로 갈 수 없었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배에서 일할 때 식사 제공이 잘 안 돼 초코파이를 먹은 게 맞느냐”고 묻자 아폴리는 한국어로 “네, 맞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답했다. ‘초코파이로 끼니를 해결했다’는 것을 한국어로 직접 말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다른 답변들은 동티모르어로 했다. 아폴리는 “하루 평균 15시간을 일했고, 딱히 쉬는 날도 없었다. 섬에서 자유롭게 나갈 수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아폴리는 “모든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이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재갑 고용부 장관은 “이런 일이 생겨서 유감스럽다.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

10분 남짓 참고인 진술을 마친 아폴리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는 “그 동안 하지 못 했던 말을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할 수 있어서 아주 행복하다. 이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든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에 온 뒤 처음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아폴리는 국감 직전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일한 지난 6년 동안 단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했었다.

아폴리는 8월 31일 전북 군산 앞바다의 섬 개야도에서 ‘탈출한’ 이주노동자다. 섬에서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 ‘사장님이 시키는 일’을 ‘쉬지 않고’ 했다고 한다. 근로계약서는 서류에 불과했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욕을 먹기 십상이었다. 사장님 허락 없이는 섬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상태였다.

전북 군산 개야도의 이주노동자들이 지냈던 한 숙소 모습. 벽지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등 열악한 환경이다. 이 방에서는 4명의 이주노동자가 생활했다고 한다. 선원이주노동자 인권네트워크 제공


아폴리는 27세이던 2014년 6월 E-9-4 취업비자(어업)로 한국에 처음 들어왔다. 한국에서 5000㎞나 떨어진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에서 온 아폴리의 두 손에 일가족 생계비와 동생들 학비가 달려 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여섯 남매 중에 아폴리를 빼고 대학생이 셋이나 된다. 고등학생과 중학생 동생도 한 명씩 있다. 아폴리는 대학을 중퇴하고 가족을 대표해 생계전선에 나서야 했다. 아폴리는 “그래도 다른 남매들이 공부를 더 잘해서 제가 학교를 안 다니는 게 아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쉬지 않고 일해 손에 쥘 수 있는 건 월급 190만원 수준. 계약서상으로는 최저임금 수준이지만 실제 근로시간을 감안하면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도 벌어야 했다. 동티모르는 청년실업률이 높은 데다 월급이 평균 115달러(약 13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열악한 근무조건 속에서도 관련 규정이 허락하는 최장 5년 기간을 가득 채우고 귀국했다가 지난해 재입국했다. 사업장을 한 차례도 옮기지 않아야 ‘성실 근로자’ 자격으로 같은 사업장에 다시 취업할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장님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아폴리는 어머니에게 힘든 내색도 하지 못한 채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서의 힘든 삶은 형제들에게만 털어놨다고 한다.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폴리는 “어머니가 알게 되면 걱정을 많이 하고 마음이 아프실 것 같아 어머니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어머니는 아폴리에게 “일할 때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일에만 집중해라.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다시 개야도에 돌아왔지만 부당한 대우를 더는 참기 힘들었다. 아폴리는 “돈을 벌려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면서도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덜 힘든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말도 없이 일해야 했다. 배를 타는 날은 잠을 1~2시간밖에 못 잤다. 아폴리가 몇 차례 휴식시간을 요구했지만 사장은 “계속 일하라”고만 했다.

섬을 떠날 자유도, 일을 그만둘 자유도 없었다. 부당한 처우를 근거로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수 있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폴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쉬고 싶다” “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때마다 사장은 “안 된다”고 했다.

마침 지난 7월 인권단체가 섬을 찾았다. 도서 지역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아폴리는 실태 조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털어놨는데, 인터뷰 장면이 지역 방송국을 통해 보도되면서 사장과 사이가 틀어졌다.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섬을 떠나던 날, 사장은 “너희는 경찰도 없어. 낙동강오리알이야”라며 “너희 마음대로 들락날락 못해. 가방 싸가지고 가”라고 욕설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개야도에서 탈출한 이주노동자 16명은 사업주들을 근로기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용부 군산지청에 고소했다. 군산지청 관계자는 “접수된 내용을 철저히 수사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7월 선원이주노동자 인권네트워크 등 인권단체와 함께 개야도 이주노동자 49명을 대상으로 인권 실태조사를 벌였다. 설문 결과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2.6시간이었고, 한 달 평균 휴일은 0.1일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못했다는 응답이 93.9%에 달했다. 욕설과 폭언(73.5%), 본업 이외의 노동 강요(26.5%), 외출 제한(24.5%), 식사 미제공(10.2%) 등 다수의 인권침해 사례가 보고됐다.

김판 이현우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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