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트렌드] 우리는 왜 어린이가 되려하나? -부캐의 시대

노경진 2020. 11. 1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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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5시, 저희 방송국 프로그램엔 늘 어린이들이 출연합니다. 어린이 프로그램은 아닙니다. 출연자들이 나이가 어려서 어린이가 아니거든요. 아무리 어른.. 심지어 할아버지라도요. 요리에 초보이면 ‘요리엔 어린이’ 즉 ‘요린이’라고 불리죠. 요린이 수십명이 백종원 씨, ‘백파더’의 레시피를 배우기 위해 프로그램에 동시접속을 합니다. 밥, 라면, 콩나물 무침...요린이들은 잘 따라하다가 실수도 하고 가끔은 멋대로 하면서 의도치않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초보자고, 또 어린이니까요.

새로 시작하면 누구나 ‘어린이’

요린이 뿐 아니죠. 요즘은 ‘헬스 어린이’, ‘헬린이’들도 유튜브와 SNS를 꽉 잡고 있습니다. 근육을 만들고 건강하고 탄탄한 바디 셰이프를 위해 헬스장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합니다. 아령을 들고 근육이 튀어나온 팔뚝 사진을 올리며 매일매일 기록처럼 남깁니다. 줄어드는 몸무게 수치도 올리고 체질량 지수도 올리고 제법 근육이 형체가 잡혔다 싶으면 복근 사진도 당당하게 SNS에 올리곤 하죠. 서로 단백질 식품 정보도 공유하며 몸짱이 되는 그 날을 꿈꾸죠. 코로나 재확산 때 헬스장이 문을 닫았을 때엔 헬린이들을 위한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 즉 ‘홈트’ 검색량이 부쩍 늘기도 했습니다.

주식 초보인 주린이, 부동산 초보인 부린이.. 심지어 게임 배틀그라운드 초보자인 배린이 까지요... 이렇게 어린이를 자처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초보자를 어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린이를 미숙한 존재라고 전제하는 거라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서열을 굉장히 강조하고 1살이라도 더 많으면 그걸 내세우곤 하잖아요. 처음 만났는데 서로 나이를 따지다 다툼이 일어났다는 기사들도 왕왕 봅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린이임을 자처하는 현상들은 새롭습니다.

‘자기 계발’ 대신 ‘내 삶의 풍요’ 위한 배움

무언가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초보자임을 당당히 드러내며 가르침을 구하는 모습이 폭넓게 퍼지고 있죠. 이 배움은 과거 직장인들의 자기 계발처럼 외국어나 회계 프로그램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의 배움이 회사나 조직 같은 외부를 향해있었다면 지금의 배움은 내 안을 향해있습니다, 주로 취미, 취향, 조예 아니면 재테크 이런 것들이요. 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또, 그냥 즐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성장을 하고 싶어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취미와 연관된 단어를 살펴봤더니, ‘새로움과 열정’란 말이 등장하고 그 빈도가 계속 높아집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키워드는 ‘지속적’, ‘성공적’.. 거기에 ‘보람’까지 나타납니다. 이 단어들을 다 조합해보면요. ‘헬린이’면, ‘새로운 취미로 헬스를 시작해 열정적, 지속적으로 하다보니 몸짱에 건강도 챙기는 성공적 결과를 이루고 보람도 느낀다’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 초보에서 점증적으로 발전해 외적 결과물 뿐 아니라 내적 성장으로까지 이어지죠.

‘만옥이와 정봉원’‥ 내려놓는 건 나이와 권위, 장착하는 건 겸손함과 열정

최근 <환불원정대>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백파더 다음에 저희 채널에서 이어지는 <놀면뭐하니> 프로그램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죠.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까지 국내 내로라하는 여성 가수들이 새롭게 팀을 구성하고 무대에 오르죠. 이효리를 중심으로 모인 다른 가수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세보이죠. ‘쎈 언니’라고 합니다. 소심이들은 하기 힘든 환불도 척척 받아낼 수 있을 거 같은.. 그래서 이름이 <환불원정대>입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담긴 그들의 모습은 소탈하고 엉뚱하고 또, 여리기까지 하죠. 경력도 실력도 그누구 못잖은 완성된 국내 탑 여가수들이지만 이들은 이같은 ‘본캐(본래의 캐릭터)’를 내려놓고 신입 걸그룹 멤버라는 ‘부캐(부 캐릭터)를 기꺼이 잡아듭니다. 내려놓는 것은 나이와 권위이고 새로 장착한 것은 겸손함과 열정입니다.

그리고 다시 초보자로 리셋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전 여기서 엄정화 씨를 특히 눈여겨보게 됐는데요. 초보자라는 부캐 덕분에 50대의 노련한 선배 가수도 20대 후배와 같은 초보자로서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첫 무대를 준비하며 떨리는 심정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국내 최고의 음반 기획자이자 본인도 뛰어난 음악인인 정재형 씨도 환불원정대 매니저 정봉원이라는 부캐로 프로그램에 등장하죠. 정봉원 매니저는 환불원정대가 지상파 음악프로그램 <음악중심>의 첫 무대에 오를 때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 뭍에 내놓은 아이 같아.” 네, 여기서도 어린이란 말이 등장하죠. 이들은 모두 초보자라는 부캐로서 걸그룹 데뷔라는 새로운 성취를 이뤄냅니다.

새로운 도전과 성취... 사실 이 얘기는 현대인들이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또 건강하게 오래 살게되면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키워드입니다. 2019년 기삽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14/0000919115?sid=101] 제가 서울시 50+센터라는 곳에서 취재를 가봤는데요. 이른바 58년 개띠들이요. 이제 60대를 맞아 은퇴들을 하시는데, 이것저것 많이 배우십니다. 배우는 내용들이 그림, 사진, 악기..이런 것 뿐 아니라 유튜브를 하기 위한 동영상 편집, 오디오북 같은 낭독극 연습 등 굉장히 세분화돼있고 전문적이이에요. 뭐랄까 은퇴 전의 현역의 열정과 노력, 전문성으로 접근하세요. 당시 ‘은퇴’와 연관된 단어들을 추출해봤더니, 3년 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자녀, 연금 같은 단어는 줄었고 미래, 방법, 정보 이런 단어가 많아졌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을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다는 스스로 준비한다는 인식이 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플랫폼 산업 확산과 n잡러의 삶은 배움과 ‘부캐’를 요구해

저는 지금의 이 배움의 열풍이 은퇴하신 분들 뿐이 아니라 전 세대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은퇴하신 분들은 조직을 떠났기 때문에 새로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세대는 조직에 몸담고 있더라도 그 조직이 나에게 직업적 안정성을 부여하거나 미래를 보장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게다가 플랫폼 산업 생태계가 펼쳐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n잡러’의 삶을 살게 되었죠, 내가 나 자신을 경영하고 스스로에게 일을 배분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인력개발을 해야해요.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개발해야하는지 자신이 알고 결정해야 해요. 다행히 각종 매체에선 ‘테드’, ‘세바시’ 같은 강연프로그램과 ‘백파더’ 등의 예능, 교양 프로그램들에서 전문가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주고 있습니다. ‘클래스 101’에선 다양한 분야의 원데이클래쓰와 강사, 수업방식이 수요자 맞춤으로 제공됩니다. 일반인들도 유튜브 등을 통해 전문지식을 전달하며 누군가 구독해주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배움을 주고 배움을 받는 게 쌍방향,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거죠. 본캐가 있고 무언가를 배우는 부캐가 있고 ... 그래서 부캐로서 성취를 이루면 그것은 또 본캐가 되고.. 그러면 또다른 부캐로서 새로운 것들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고 있나요? 부캐가 있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그럼 다음 트렌드분석으로 뵙겠습니다. 당신의 삶의 트렌드입니다.

▶ 관련 영상 보기 [M라운지-니가트렌드]

[니가트렌드] MBC 노경진 기자

트렌드 분석 코너. ‘니가트렌드’는 ‘메가트렌드’를 패러디한 명칭으로 ‘메가트렌드’의 통시적인 관점 대신 미시적이고 섬세한 접근을 추구한다. 메가트렌드의 정의인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조류’ 가 지금 현재 ‘당신의 삶’ 속에 구현되고 있는 것을 살펴본다는 뜻. 일상에서 입고 보고 먹고 즐기는 모든 것이 단순히 핫하고 힙한 상품이 아니라 시대를 관통하는 도도한 흐름의 유의미한 단면이라는 것을 함께 탐구해본다.

(노경진)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zoomin/newsinsight/5971650_291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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