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현진건의 무영탑을 만나러 간 경주

입력 2022. 1. 1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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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일장기 지운 책임에 옥살이
작가에게 문학은 목숨을 건 '투쟁'

세미나 장소를 경주로 잡자고 한 것은 현진건 때문이었다. 그의 역사소설 ‘무영탑’을 읽고 마음이 경주를 향해 움직인 것이다. 경주는 얼마 만이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는데 석삼년은 된 것 같다. 가보기는 했어도 제대로 된 답사처럼 가본 지는 꽤 오래되었다.

십년 전 학계에서 한국에서의 민족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이광수와 함께 현진건의 역사소설이 화제로 떠오른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의 민족 자체가 일본의 번역어고, 한국에서 민족 성립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 민족 개념에 힘입은 것이며, 일본의 식민사학자가 ‘발명’한 삼국통일 개념을 지렛대 삼아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한민족이 성립되었다는 것이고, 이광수와 현진건의 역사소설은 바로 그러한 민족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제국이 준 민족과 민족주의이니만큼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하위 사상에 지나지 않고 식민지 체제에 대해 근본적 위협도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마라토너 손기정이 1936년 여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소식을 전하면서 동아일보는 그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렸는데, 그때 붓칠을 한 사람은 청전 이상범이라 했고 현진건은 사회부장으로 그 책임을 추궁당해 1년간이나 옥살이를 하고 신문사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광수는 이듬해 여름에 시작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본래 수양동우회는 도산 안창호의 사상을 국내에 착근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이광수와 주요한, 그리고 김동인의 형 김동원 등에 의해 추진된 단체였다. 중일전쟁 발발과 시기를 같이하는 이 수양동우회원의 검거 선풍은 전쟁 후방기지라 할 조선의 사상계를 협력적으로 만들고자 한 조선총독부의 책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이광수는 병보석으로 풀려나 사상 전향, 대일협력의 길을 걷게 된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현진건은 지금 표석만 남아 있는 부암동 집으로 이사해 양계로 호구지책을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무렵 1938년 7월 20일부터 1939년 2월 7일에 걸쳐 연재한 작품이 바로 이 ‘무영탑’이었다.

우리 일행은 경주 코오롱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세미나까지 마친 다음날 아침 나는 드디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무영탑, 곧 석가탑을 만나러 불국사로 향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연화교와 칠보교, 백운교와 청운교의 불국사 경내에 접어들며 나는 불국사의 추억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우리 학생 때는 이 불국사가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였다. 또 김윤식 선생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석굴암 순례에 관해 흥미진진한 연구를 남기셨고, 나는 언젠가 일본 연구자와 함께 경주 순례에 나서기도 했었다. 그때쯤 나는 이태준 소설 ‘석양’에 담긴 경주의 쓸쓸한 이미지에 한껏 매료되어 있었다.

상념 속에서 천천히 걸어 마침내 나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대웅전 앞 뜰에 들어섰다. 이번에 나는 현진건 선생이 그려낸 백제 석공 아사달과 아사녀의 비극적 이야기와 함께 석가탑의 아름다움을 ‘실카장’ 맛볼 ‘세음’이었다.

과연 작품에 그려진 바로 그 석가탑이었다!

부여의 장인 아사달이 이 탑을 세우기 위해 이곳에 온 지도 어언 삼년, 아리따운 아내 아사녀는 그리움을 못 견뎌 서라벌로 향하는데, 탑돌이에 나온 서라벌 귀족의 딸 구슬 아가씨 주만은 아사달의 집념에 찬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소설 ‘무영탑’이 비극으로 그려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 탑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과거와 현재 사이에 확실히 달라진 것이, 옛날의 내가 다보탑에 마음을 빼앗겼다면 지금의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이 석가탑의, 일견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섬세하다 못해 날카롭기까지 한 그 ‘선’(線)에 마음을 찔리고 있는 것이다.

현진건은 이 작품을 연재하고 불과 3, 4년 만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생각한다. 선생은 일장기를 없앨 수 있는 용기와 역사를 문학적 상상의 영역으로 옮길 수 있는 역량을 함께 지닌 작가였다. 끔찍한 통치를 이어가는 일제에 맞서 무영탑의 ‘미’(美)로써 민족의 정신을 지켜낸 이 작가에게, 문학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던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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