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명 희생됐지만.. 폐 손상 3·4단계 피해자 손해배상 0명 [심층기획-가습기 살균제 참사 11주년]
'인과성 높다 판단'된 1·2단계만 구제
5월 세상 뜬 전 배구선수 안은주씨
폐 이식 수술 2번 했지만 3단계 판정
2020년 입증 책임 대폭 완화했지만
적용된 판결은 아직 없어 '희망 고문'
쌓이는 빚에 걱정 큰 피해자들
3단계 피해자 손배 첫 인정 판결에도
대법원 최종판단 2년6개월째 기다려
"기업, 형사재판 무죄 땐 버티기" 지적
지난 3일, 전 배구선수 안은주(54)씨가 12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며 새로 기록된 가습기살균제 참사 공식 사망자 수다.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지 11년이 지났다. 가습기살균제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돼 징역 6년을 확정받은 신현우 전 옥시레킷벤키저 대표는 12일 만기출소했다. 그가 자유의 몸이 될만큼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피해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피해 구제는 요원하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보상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는 최근 활동 기한을 연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구제지원금의 60% 이상을 분담하는 옥시와 애경산업은 빠졌다. 조정위가 무산 위기에 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13일 법원에 따르면 가습기살균제 3·4단계 피해자가 가해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승소해 배상받은 사례는 0건이다. 정부는 참사 초기 제품 사용과 폐 손상 사이 인과관계를 따져 피해자들을 4단계로 분류했다. 이 중 인과성이 높다고 판단된 1·2단계 피해자들에게 주로 정부지원금과 가해 기업의 배·보상이 집중됐다.
3·4단계 피해자들은 피해 구제를 촉구하며 손배소를 제기했다. 인과성은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들의 폐 손상이 경미한 것은 아니다. 고 안은주씨도 폐 이식 수술을 2번이나 받았지만, 3단계 판정을 받았다.
법조계에서는 3·4단계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적 구제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실제 손배소 상당수가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은 상태로 5년 넘게 멈춰 있다. 3단계 피해자에 대한 기업의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은 대법원 최종 판단을 2년6개월째 기다리고 있다.
환경부는 2020년 3월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를 위한 특별법’을 개정해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대폭 완화했다. 개정된 특별법 제5조 ‘인과관계 추정’ 조항은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됐고, 그 이후 질병이 발생하거나 악화했으며, 그 둘 사이에 ‘역학적 상관관계’가 있으면 인과관계를 인정하도록 했다. 이 조항이 폭넓게 적용된다면 피해자들의 배상길도 대폭 넓어질 수 있다.
의료소송 전문 김용범 번호사(법무법인 오킴스)는 “역학적 상관관계는 쉽게 말해 ‘일반화’를 해 준다는 것”이라며 “개별적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선 한 개인이 가습기살균제를 몇 시간씩,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흡입했는지 등을 다 증명해야 하지만 상관관계는 통계상 발병 확률 등 일반적인 연관성이 있으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상관관계를 통해 추정된 인과관계를 깨려면 기업 측은 개개인의 기저질환, 살균제 흡입 빈도, 체질 등을 일일이 조사해 반박해야 한다. 기업 측이 이를 뒤집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법조계 평가다.
“저희 가족 1년 치료비만 6000만∼7000만원은 됩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채경선(47)씨는 2009년 제품을 사용한 뒤 기관지확장증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그의 남편과 자녀들 건강도 악화됐다. 1년에 드는 가족 치료비가 자신의 연봉 액수에 맞먹는다. 그나마 피해구제법이 개정돼 피해자로 인정받으면서 일부 지원을 받게 됐지만, 거액의 치료비로 인한 빚은 쌓여만 간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사법적 구제’에 대한 기대감을 접어 가고 있다. 3단계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이 나왔지만 배상 액수가 500만원에 불과한 탓이다. 채씨는 “제 아들은 백혈병이 의심된다고 골수검사까지 받았다”며 “한 번만 입원해도 500만원이라는 비용으론 택도 없다”며 힘없이 말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기업들은 형사에서 무죄가 나오면 손해배상 재판이든 조정안이든 ‘배째라’는 식으로 나온다”며 “형사 재판 무죄라면 민사도 패소할 게 뻔해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 성분 피해자의 경우 차라리 판결이 안 나오는 게 낫다”고 말했다.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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