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 이틀전, 웃었을 성추행범..'유명무실' 조항에 당했다 [그법알]

오효정 2022. 5. 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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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법알 사건번호 27] 어렵게 고소한 13년 전 성추행 사건에..."공소시효 얼마 안 남아"

A씨는 지난 2008년 미성년자 시절 강제추행을 당한 뒤, 13년이 지난 지난해 11월 가해자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그간 A씨는 스스로 "아무 일도 아니다"라고 세뇌하며 시간을 견뎠다고 합니다. 가해자를 바로 고소하고 싶었지만, 대면이 두려웠고, 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묻고만 지나가는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공소시효 만료가 다가오자 어렵게 용기를 냈습니다. "이 일을 죽기 전에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A씨가 경찰을 찾은 시점은 공소시효를 한 달여 앞둔 때였습니다. 이에 경찰은 "가해자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데다, 공소시효도 얼마 남지 않아 더는 수사하기가 어렵다"며 불송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통상 절차에 따르면 A씨 측은 먼저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신청해야 합니다. 그럼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고, 검찰 역시 불기소 처분을 내릴 경우 '항고'를 할 수 있습니다. 불기소 결정을 내린 검찰청의 상급청으로부터 다시 판단을 받아보는 건데, 이 항고까지 기각이 되면 법원에 '재정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A씨 입장에서는 수사 기관의 외면도 억울한데, 시간과도 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 이 모든 절차를 밟기엔 공소시효 만료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죠. A씨 측은 시효 만료를 이틀 남기고 바로 법원을 찾았습니다.



관련 법령은!

형사소송법 제260조에 따르면, 고소인은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검사의 통지를 고등법원에 들고 갈 수 있습니다. '재정신청'을 통해 수사 기관의 결정이 옳았는지, 판단을 받아보는 건데요.

그런데 재정신청을 하기 위해서는 앞서 설명해 드린 항고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다만, 예외가 있습니다. 아래의 경우에는 항고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바로 재정신청을 통해 법원 판단을 받아볼 수 있는 겁니다.

1. 항고 이후 재수사가 이루어진 다음, 또다시 공소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통지를 받은 경우
2. 항고 신청 후 항고에 대한 처분이 이뤄지지 않고 3개월이 지난 경우
3. 검사가 공소시효 만료일 30일 전까지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경우

A씨 측은 3번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내린 만큼, 항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재정신청을 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재정신청을 하면서 공소시효도 중지됐습니다.

A씨가 경찰 불송치 결정에 이의신청을 해둬 사건은 검찰에도 가 있었는데, 검찰 역시 법원에 재정 신청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 우선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법원 판단부터 받아보라는 겁니다.



법원 판단은!

수사기관의 판단이 옳았느냐를 두고 서울고법 형사30부(배광국·조진구·박은영 부장판사)가 심리에 나섰습니다. 재판부는 두 차례 심문 기일을 열어 A씨의 진술을 직접 들었습니다. 피해자가 사건 당시 쓴 일기, 주변인들의 사실확인서 등 증거도 확인했습니다.

지난 6일 재판부가 내린 결정은 "공소를 제기하는 게 맞다", 즉 가해자의 혐의를 수사해 재판에 넘겨야 한다고 봤습니다. 형사소송법상 재정신청이 인용되면 관할 검찰에서는 지체 없이 담당 검사를 지정해야 하고, 해당 검사도 공소를 제기해야 합니다.

A씨를 대리한 이현주 변호사(법무법인 시선·여성변호사회 총무이사)는 "재정신청 제도가 형사소송법 구석에 있는 조문이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조문이지만, 피해자와 대리인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소까지 상당한 시간을 망설이는 데다, 수사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그사이 공소시효가 만료돼 사건이 종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재정신청 제도는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늘 단골처럼 따라다녔습니다. 매년 낮은 인용률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0년만 해도 서울고등법원, 수원고등법원 등 6개 고등법원에 접수된 재정 신청 건은 2만8000여건인데, 이 중 공소제기 결정이 나온 건 단 167건뿐입니다. (2021 사법연감)

수사에 미진한 점이 보여도 재판부가 충분히 뜯어보고 심리할 여건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맡은 사건에 더해 재정 사건까지 추가로 배당되면 업무 부담이 더욱 가중돼, 충실히 심리할 여유가 없다는 게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습니다. 이 때문에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재정 신청을 해도 인용되는 일이 없다"는 인식이 커졌다고 합니다.

이에 서울고등법원에서는 2020년 재정신청 전담부를 새로 꾸렸는데요. A씨 사건은 이 전담부에서 심리됐습니다. 여성변호사회는 "재정신청 전담부에서 집중 심리한 결과 이 사건 결정이 나올 수 있었다"고 환영하며, "향후 법원의 공정한 법 적용을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 그법알

「 ‘그 법’을 콕 집어 알려드립니다. 어려워서 다가가기 힘든 법률 세상을 우리 생활 주변의 사건 이야기로 알기 쉽게 풀어드립니다. 함께 고민해 볼만한 법적 쟁점과 사회 변화로 달라지는 새로운 법률 해석도 발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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