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보야"..평생 '아래'에서 살다간 선지자<김수환 추기경의 일생>

2009. 2. 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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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한국현대사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선지자(先知者)로 살았던 김수환 추기경. 그는 지난해 8월 우리 앞에 뜻밖의 그림을 내놓았다. 당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동성중고교 개교 100주년'전에 추기경은 직접 그린 자화상 '바보야'를 출품해 화제를 모았다. 노년에 이르러 스스로를 '바보'라 칭한 추기경의 소탈함에 모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당시 김 추기경은 자화상에 대해 "내가 잘 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 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어이쿠.. 그러니 내가 제일 바보스럽게 살았는지도 몰라요."

동그란 얼굴에 눈, 코, 입을 쓰윽쓰윽 단순하게 그린 후, 많고 많은 글귀 다 마다하고 '바보야'라는 세글자를 써넣은 이유를 묻자 추기경은 "글쎄요, 그림을 보고 '아이고 미련스럽다. 이걸 무슨 작품이라고 내놨나'할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어때요? 나 바보같이 안 보여요?"라고 되물었다.

또 "어떻게 사는 게 괜찮은 삶이냐"는 질문에는 "그거야 누구나 아는 얘기 아닌가"라고 주저없이 답했다. "사람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알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해요. 그걸 실천하는 게 괜찮은 삶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세간에 큰 화제를 뿌렸던 김 추기경의 그림 '바보야'는 추기경이 혜화동 주교관서 하루 만에 그린 것이다. 김 추기경은 1941년, 동성중?고교의 전신인 동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인연으로 기념전에 참여했다. 당시 추기경은 건강상태가 나빴음에도 후배들이 정성스레 마련한 전시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참석했다.

1922년 독실한 가톨릭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1951년 사제서품을 받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됐던 김추기경. 그동안 시대를 꿰뚫으며 주옥같은 말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었던 그는 그림으로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던 것. 스스로를 꼭 빼닮은 순수한 그림들은 보는 이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었다.

당시 추기경은 드로잉 14점과 평소 아끼던 글을 쓴 판화 7점을 내놨다. 모두 직접 그린 작품이다. 그림을 받았던 후배 한진만 홍익대 교수(화가)는 "추기경님은 연로하셔서 그림을 그릴 때 유성파스텔을 오래 못 들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중간중간 팔을 주물러드렸는데 몸은 불편하셔도 정신은 얼마나 맑으셨는지 모르세요. 유머감각도 뛰어나시고요"라고 했다.

추기경은 문화사랑도 남달랐다. 숭례문이 화재로 붕괴됐을 때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TV화면을 지켜본 그는 "너무나 통탄할 일입니다. 국보에는 얼마나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풍요하든, 그렇지 못하든 선조의 얼이 담긴 유산은 내 집 물건보다 더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국민의 문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문화적 안목 또한 높아져야 합니다"고 지적했다.

추기경은 틈 날 때마다 어머니 서중하(1955년 작고)여사를 떠올리곤 했다. 어머니는 당신 이름 석자와 하늘 천(天), 따 지(地)밖에 몰랐지만 추기경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어머니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추기경의 어머니는 평생 옹기와 포목을 팔고다니며 아들 둘을 성직자로 만들었다. 김 추기경이 참으로 험난했던 시절 독재정권에 맞서 올곧은 소리를 당당히 낼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강인함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무릎에 기대 영면한 어머니를 회고하며 "어머니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다 받아주시고, 어떤 허물과 용서도 다 덮어주셨다"고 했다. 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이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고 자책한다.

추기경은 가난하고 못 배운 어머니에게 자신이 늘 미치지 못했음을 이처럼 고백하곤 했다. 지상(地上)에서건 천상(天上)에서건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는 결코 마르지 않듯 김추기경 역시 우리 겨레를 위해 오늘도 천상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실 것임에 틀림없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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