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천재 고 강대원 박사는 누구

오동희 기자 2009. 5. 1. 10: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머니투데이 오동희기자][[명예의 전당 헌액 고 강대원 박사-하] 내가 기억하는 강대원]

에디슨과 노벨 등이 이름을 올린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다음달 2일 헌액되는 고 강대원 박사는 어떤 인물일까?

국내에서는 그와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931년 5월4일생으로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올해 78세다. 그는 보성고 교장, 진주중, 진주고, 부산사범대 학장을 지낸 강정용 선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중학교(고등학교 포함)를 월반한 데 이어 서울대 물리학과에서도 조기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을 떠나 36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별세해 가까운 지인이 많지 않다. 심지어 그가 30년간 근무했던 알카텔-루슨트(벨연구소)의 사장을 맡은 김종훈 박사도 그에 대한 기자의 질의에 프로필 정도만 보내왔다.

강 박스는 한국 전쟁 중에 해병대 통역장교로 복무한 후 1955년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공부하다가 도미해 1년만인 1956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서 이학석사(M.Sc)를 받았다. 그리고 3년만인 1959년 박사학위를 받은 그 해에 당시 세계 최고의 연구소인 벨연구소에 입사했다. 서울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지 4년만의 일이다.

작은 기억의 단편으로나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로는 강 박사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며 반도체 분야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들이다. 김충기 KAIST 특훈교수, 강기동 박사(전 한국반도체 설립자), 한국인 최초로 미국 4년제 대학총장을 역임하고 있는 UC머시드의 강성모 총장 등이 그들이다.

김충기 교수는 "1960년대 후반 미국 페어차일드반도체에서 현재 디지털카메라에 쓰이는 고체촬상소자(CCD)를 연구할 당시 벨연구소에 간혹 들렀는데 그때 강대원 박사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며 "그는 반도체 학계에서는 전세계적인 명망을 얻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내에 입국할 때 그를 만났었다는 김 교수는 한국 반도체사에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강기동 박사와 함께 강대원 박사의 이름이 꼭 기억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충기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인 KAIST 교수들에게 전자공학과 학생들을 처음 가르치는 개강 수업에 모스펫을 개발한 강대원 박사에 대해 꼭 소개하라고 얘기한다고 한다. 김충기 교수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장관이나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 담당 사장, 임형규 삼성전자 신사업팀 사장, 오춘식 전 하이닉스 부사장, 경종민 KAIST 교수 등 반도체 업계의 내로라하는 베테랑들을 길러낸 한국 반도체 학계의 대부다.

2007년부터 UC머디스 총장을 맡고 있는 강성모 총장은 1977년 1985년까지 벨랩에서 일하면서 강대원 박사와 인연을 맺었다.

강 총장은 "77년 벨연구소에 들어갈 때에는 CMOS가 등장해 한창 관심을 끌고 있을 때다. 당시 벨연구소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강대원 박사가 있었다. 그 분은 MOS 트랜지스터라는 큰 발명을 해 매우 유명한 분으로 '두원 캉'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민족과학네트워크와의 인터뷰에서 소회를 밝혔다.

강 총장은 강 박사와 함께 트랜지스터 만드는 일을 했고, 4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인텔이 먼저 만들었지만 32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CMOS 기술로 개발한 것은 우리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강 총장은 기자와의 이메일을 통해 이같은 기억을 회고하고, 강 박사의 업적에 대한 간단한 소개자료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반도체(삼성전자 반도체의 전신)를 설립한 강기동 박사는 강대원 박사와 같이 경기고, 서울대, 오하이오주립대를 거친 3년 후배로 강기동 박사가 대학졸업 후 미국에서 진로를 결정할 때 벨랩에 먼저 가 있던 강대원 박사가 그의 진로 상담을 하기도 했다.

강기동 박사는 "내가 처음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끝낸 후 모토로라연구소에 갈려고 하자 강대원 박사가 IBM왓튼 연구소로 가라고 했다"며 "벨연구소와 쌍벽을 이루는 IBM연구소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라고 했으나, 나는 생산현장에서 만드는 것을 좋아해 당시 반도체로 미국 내에서 제일 유명했던 모토로라의 연구소에 취직했다"고 회고했다.

국내에 처음 초고속 인터넷(ADSL) 기술을 도입하고, 주전산기 개발에 참여했던 김건중 박사(현 전자정보인협회 회장, 전 한국정보통신 사장)는 "그는 술은 약했지만 담배를 좋아하는 끽연가였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그는 1992년 5월경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뉴저지 인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대동맥류 파열로 뉴저지 뉴브룬스윅에 있는 성베드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수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이날이 1992년 5월 13일이다. 고 강대원 박사는 부인 강영희씨와 다섯명의 자녀가 있으며, 자녀 중 셋째딸인 릴리 강은 미국 내 세법 전문가로 현재 미국 시애틀 대학의 교수로 있다.

[관련기사]☞ 故 강대원 박사의 발명이 바꾼 세상에디슨과 나란히.. 반도체 대가 故 강대원 박사[인물+]故 강대원 박사를 기리며...모바일로 보는 머니투데이 "5200 누르고 NATE/magicⓝ/ez-i"오동희기자 hunte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