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마타 역사는 병의 수용 둘러싼 대립의 50년"

입력 2010. 9. 13. 11:13 수정 2010. 9. 1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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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전은옥 기자]

▲ 산쪽에서 내려다본 미나마타와 칫소 전경

산 언덕에 올라 바라본 미나마타 시내와 바닷가, 그리고 칫소 공장과 사택 전경.

ⓒ 전은옥

1945년 8월 패전 당시만 해도 폐허의 땅이었던 일본은 1950년을 지나면서 고도 경제성장의 오르막길을 질주한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기술도 놀랄 만큼 발달하였고, 사람들의 생활도 풍족하고 편리해져 갔다. 전쟁 중의 궁핍함과 전후의 가난에서 풍요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액정, 유기 EL재료, 전자 부품, 실리콘 제품 등 현대사회에서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히 관련된 물건과 자재를 개발하는 일본의 대기업 '칫소(Chisso)'는 1908년 미나마타에 공장을 설립했다. 칫소는 화학비료를 생산했고 곧장 국내 화학공장의 중심이 되어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는 기업 중 하나로 성장해 갔다. 시골이었던 미나마타에 인구가 유입되었고, 미나마타는 공업도시로 변모해 가는 듯 하였다. 칫소의 발전은 곧 미나마타의 화려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칫소의 발전, 미나마타의 화려한 미래처럼 보였으나...

▲ 핫껜 폐수구

칫소가 1932년부터 68년 5월까지 메틸수은을 포함한 폐수를 무처리 상태로 흘려보낸 미나마타병 발병의 근원지 핫껜 폐수구. 칫소가 흘려보낸 수은의 양은 70~150톤에 이른다고 한다.

ⓒ 전은옥

칫소 창업으로부터 100여 년. 미나마타는 칫소의 기업 지배하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칫소의 막강한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54년 전, 즉 1956년 5월 1일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미나마타 시 쓰키노우라에서 두 살, 다섯 살의 어린 여자아이들에게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거운 병이 발병, 이후 역사는 이날을 미나마타 병의 '공식적인' 확인일로 기록한다.

미나마타병을 '공식' 확인한 것은 칫소 부속 병원이었다. 칫소공장 직원의 진료소로 발족한 부속병원 소아과에 1956년 4월 21일, 다섯 살의 여자 아이가 뇌 증상을 호소하여 방문했고, 8일 후 여동생이 같은 증상으로 입원했다. 이 두 아이의 모친으로부터 옆집에도 비슷한 증상의 환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호소카와 원장은 5월 1일 미나마타 보건소에 "원인불명의 중추 신경 질환자가 다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제대로 걷지 못하거나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손발에 경련이 일어나는 환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병증이 무거워서 발작을 일으켰다가 수십일 내에 사망하는 환자도 있었다.

미나마타 병이 발생한 시라누이 바다는 예전에는 풍부한 어장이었다. 특히 미나마타만은 물고기들이 산란을 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잡아도 잡아도 물고기가 항상 넘쳐나는 보물 상자였다. 지형적으로 벼농사를 짓기 어려웠던 바닷가 사람들은 물고기가 쌀보다 물고기를 주식으로 먹고 살 정도로, 물고기는 지역주민의 생명 그 자체였다. 그러나 칫소가 미나마타만에 흘려보낸 공장폐수에 의해 바다 물고기와 생명들이 수은에 오염되고, 그것을 알 리 만무했던 주민들도 열심히 살기 위해서 날마다 그 물고기를 먹었다.

1950년대 전반부터 물고기가 해수면 위에 떠오르거나, 조개가 죽기도 하고, 해초가 성장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공장 폐수가 흘러든 미나마타만은 오염이 극심하여, 수은을 다량 포함한 침전물이 해저에 쌓여갔다.

또 시라누이 바다 해안 근처에서 물고기를 먹은 고양이가 발작을 일으키다 죽었고, 새가 날지 못하고 떨어지거나, 닭과 돼지가 발작을 일으켜 죽는 일들이 발생했다. 사람이 병에 걸리기 전에 이미 작은 생물들에게 대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미나마타 해안 주변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미나마타병 환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바닷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기업도 정부도 쉬쉬 하다, 죽어나간 사람들

▲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낀 미나마타

여느 시골 마을의 풍경처럼 평온해 보이는 미나마타. 바다와 산을 끼고 어촌과 농촌이 형성돼, 지금은 반농반어로 생활하는 주민이 많다.

ⓒ 전은옥

당시 미나마타병은 '괴질'이라고 불려 마치 전염이라도 되는 듯이 환자를 격리시켰고, 오해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도 점차 환자와 그 가족을 기피하고 따돌리기 시작했다. 미나마타병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건강과 삶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차별에 고통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나마타병이 초래한 건강 피해와 삶의 파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병에 걸렸든 안 걸렸든 지역사회 전체를 휩쓸면서 장기간에 걸쳐 주민들의 생활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기업은 끝끝내 책임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두 손 두 발을 들었지만, 국가가 공장 폐수 배출에 제동을 걸기 전까지는 당당하게 배출구를 바꿔가며 폐수를 배출하여 피해 지역의 범위를 더욱 확대시켰고, 오염을 극대화시켰다.

국가는 미나마타병이 메틸수은 중독에 의한 끔찍한 병이라는 것을 알기 전, 미나마타 만에서 잡힌 물고기가 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파악했을 때 곧바로 중대한 조치를 내려 시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단순히 섭취 자제를 권유하는 차원에서 그쳤다. 기업은 생명을 파괴하고, 국가는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보다 지지부진한 대응으로 더욱 확대시켜 버린 것이다. 이 사이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미나마타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 사회의 갈등도 심각해져 갔다.

미나마타 병과 칫소 공장 폐수 사건이 미나마타 주민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에 제기하는 문제와 교훈은 대단히 근본적이며 중대한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도 제2의 미나마타, 제3의 미나마타와 같은 환경문제와 기업활동이나 국책사업으로 인한 공해병은 발생할 수 있고, 그속에서도 피해에 직격탄을 입은 이와 그렇지 않은 사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시에 존재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칫소의 기업활동을 통해 이익만을 얻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혜자이면서 피해자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전혀 미나마타의 아픔과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숨기고 싶은 미나마타병, 대립의 역사 50년

▲ 미나마타병 자료관 증언활동가들

미나마타병의 피해와 아픔, 그리고 기업과 정부, 사회의 차별을 상대로 싸워온 삶을 증언하는 '스토리텔러'활동을 하는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의 얼굴과 이름이 자료관 한 쪽에 소개되고 있다.

ⓒ 전은옥

미나마타 병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후 지난 50년 동안 지역주민들은 미나마타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로 갈라졌다. 환자와 그 가족은 하루 하루를 미나마타병과 함께 살아가는 길 이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나 그밖의 사람들은 미나마타병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떠안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미나마타병을 멀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존재를 부정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라는 선택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나마타의 50년은 미나마타 병의 수용을 둘러싼 대립의 역사였다"고 구마모토 대학 미나마타학 연구팀은 말하고 있다.

미나마타 시민들 사이에서는 미나마타 사람들이 전부 병에 걸렸다는 편견과 차별을 받을 수 있다면서 정부에 대해 '미나마타병'이라는 병명을 변경해달라는 탄원을 냈다.

이것은 장애를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극복되지 못한 측면도 있고, 실제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 장애인이나 병을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구조가 모든 사람을 억누르고 있는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미나마타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보다는 감추고 외면하고 싶은 심리를 담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기업 칫소 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런 분위기는 10여 년 전부터 점차 바뀌기 시작해, 지금은 미나마타병을 수용하면서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미나마타에는 시립 미나마타병 자료관과 시민이 설립한 소시샤 미나마타병 역사고증관이 있고, 국립 미나마타병 종합연구센터와 정보센터, 환경센터 등이 설립되는가 하면, 환자들과 지역 장애인들의 자활을 위한 다양한 복지시설과 공동체, 미나마타병의 역사를 살려 친환경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대안적인 생산,판매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칫소가 폐수를 흘려보내 바다와 인간의 삶을 모두 파괴해버렸던 50년 전, 미나마타 시의 인구는 약 5만 명(그중 1만 명은 칫소 공장 직원과 그 가족)이었으나, 이제는 3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칫소도 공장 재편을 통하여 미나마타 공장을 축소하였으나, 여전히 액정 등 중요한 제품을 생산하는 중핵공장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미나마타병 환자와 가족, 지역 주민들은 칫소에 복잡한 감정을 안고 있다. 칫소가 미나마타병을 일으킨 것은 용서할 수 없지만, 그러나 칫소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칫소가 성실하게 회사를 운영해가면서 앞으로는 공해를 일으키지 않는 한편, 기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번영을 해서 피해자에 대한 마땅한 배상책임도 지고, 지역사회에 해를 끼친 만큼 그만큼 다시 사회에 공헌하는 기업이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 시립 미나마타병 자료관내 전시코너

미나마타병을 일으킨 가해 기업인 '칫소'가 어떤 상품을 생산하고, 우리의 생활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코너.

ⓒ 전은옥

수은 침전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미나마타에서는 오염된 곳을 매립하는 공사를 벌였기 때문에, 이제 미나마타 바닷가의 경관은 많이 변했다. 미나마타병 피해가 발생했던 바닷가를 매립한 곳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친환경'을 외치는 공원이 들어섰다.

시와 현에서는 미나마타의 바다는 이제 깨끗해졌으며 안심하고 물고기를 잡아 먹고 해수욕을 즐겨도 된다고 선전 중이다. 그러나 미나마타의 어업은 예전에 비해서 상당히 붕괴했으며, 지금은 반농반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거대한 매립지는 말끔한 공원으로 변신했지만, 그 밑에 잠든 유기수은과 미나마타의 피해만큼은 잊어서는 안 되리라.

▲ 시립 미나마타병 자료관 뒤편 메모리얼

미나마타병 자료관 뒤쪽에는 미나마타병을 기억하고 생명과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의미로 조형예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 전은옥

▲ 공원에 설치된 미나마타병 희생자 추모비

유기수은을 매립한 땅위에 조성된 공원 안에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 전은옥

미나마타시에 한 번 가봐야 할 이유

▲ 공원으로 조성된 친수 호안

미나마타만 매립지의 서쪽 끝에 조성된 공원. 아름다운 산책길이지만, 이 아래는 유기수은이 잠자고 있다. 미나마타병의 원인 물질이 묻힌 땅(매립지)과 바다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다.

ⓒ 전은옥

미나마타는 54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상처 속에서 뜨거운 생명의 힘으로 희망을 만들어가며 살아온 미나마타병 환자들은 인류 사회에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편리함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소비문명이 과연 올바른가, 우리의 문명과 우리의 생활 시스템은 이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 위해 미나마타시에 한 번쯤은 꼭 가볼 일이다.

미나마타병 사건은 또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도 던져준다. 기업활동이든 국가의 행정이든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할 때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오는지, 또 시민이 기업과 국가 행정을 철저히 감시하고 비판적인 역할을 하는 속에서 국가도 기업도 지역과 시민들의 삶도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며, 우리가 다양한 장애와 질병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른 척하면서 부끄러워하면서 차별과 대립, 외면의 자세로 살아갈 것인지 혹은 함께 더불어 살면서 공동의 문제로 싸워나갈 것인지를 묻고 있다.

▲ 미나마타 특산품 매장

상처를 딛고 친환경 복지 도시로 태어난 미나마타에서는 밀감재배가 유명한데, 밀감과 다양한 과일로 특산 주스를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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