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밥처럼 수북한 전라도 밥상 이야기

변진경 기자 입력 2013. 11. 24. 18:59 수정 2022. 8. 2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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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 식탐〉/르네상스 펴냄

흔한 음식 책이 아니다. 전국 팔도 맛집이 나오지도 않고 세계의 별미가 소개되지도 않는다. 유명한 셰프가 전하는 레시피도 아니고 비싼 음식 재료가 등장하는 고급 요리 소개도 아니다. “돈 받고 팔 일도 없고, 누구한테 치사받으려는 뜻도 없는, 그저 무심한 듯 차려낸 무수한 삼시 세끼의 이야기.” 바로 어머니들이 자식 앞에 차려내는 밥상이 〈풍년 식탐〉의 주인공이다.

저자 황풍년 〈전라도닷컴〉 편집장은 3년 전부터 ‘소박하지만 위대한’ 어머니들의 밥상을 찾아 전라도 전역을 누볐다. 구례 김정자 아짐의 새꼬막과 고치적, 완도 황성순 아짐의 해우국, 고창 김정숙 아짐의 노랑조개회무침과 김칫국, 남원 고광자 아짐의 나물전…. “우리 집 식구들 음식이제. 어디다 내놓을 것은 아니고”라며 겸양하는 어머니들을 졸라 가족 맞춤형 밥상을 한 상 뚝딱 차려내는 과정을 꼼꼼히 취재해 〈전라도닷컴〉에 40여 회 연재했고, 그 가운데 27개 밥상이 〈풍년 식탐〉에 올랐다.

구수하고 차진 ‘아짐’들의 입말 담아내

<풍년 식탐>의 저자 황풍년 편집장.
저자가 ‘아짐’이라 부르는 우리 어머니들은 이미 우리나라 최고의 조리사들이다. 음식 재료 선별·보관·조리 전반의 과정에서 이보다 더 깐깐할 수 없다. 저자가 어렵사리 구해간 물메기 세 마리를 보고 “이런 거는 먹도 안 했는디”라며 혀를 차는 광주 김연옥 아짐처럼 식재료를 고르는 어머니들 눈높이는 7성급 호텔 주방장을 뺨친다. “고구마보다 잘 썩으니 불 땐 방에서 신주 우대끼(보호하듯이), 심지어 사람하고 같이 지내야 한다”라는 것은 남원 강공님 아짐이 지키는 토란 보관법이다. “지금 사람들은 쓰문 설탕 치고 그러는데 그것은 음식이 아니여. 쓰문 쓴 대로 묵어야 음식이제”라는 음식 철학을 내보이는 영광 안영례 아짐에게서도 역시 범접할 수 없는 달인의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책에 소개된 음식만큼 그걸 만들어내는 아짐들의 입말도 여간 구수하고 차진 게 아니다. 강진 이인심 아짐이 전하는, 흡사 랩 가사 같은 매생이국 끓이는 방법을 들어보자. “인자 저것을 다끌다끌 끼래. 점점 매생이가 물거져 풀어지제. 뚜껑은 안 닫아. 너무 팍 끼리문 색이 노래진께.” 이런 아짐들 옆에 찰싹 붙어 음식과 말이 벌이는 맛의 향연을 실컷 누려온 덕인지 저자의 글말도 아짐들 못지않게 맛나다. 이를테면 토란국 끓이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는 식이다. “들깨물이 되직해지고 보기에도 몹시 뜨거운 방울이 뽀록뽀록 터진다. 아짐은 소금을 흩치듯 뿌려 젓는다. (중략) 이제 삶아서 건져놓은 알토란을 냄비 안에 하나씩 하나씩 톰방톰방 떨어뜨리면서 국자로 살살 저어준다. 국물이 눋지 않도록, 토란이 서로 엉켜 붙지 않도록 시종 눈을 떼지 않고 손을 노대야 한다.”

그렇게 맛나게 재미지게 전하는 자세한 조리 과정은 〈풍년 식탐〉을 한 권의 훌륭한 레시피 사전으로도 만든다. 물론 평범한 레시피는 아니다. 마른취, 집줏잎, 원추리, 민들레, 머위, 곰밤부리, 쑥부쟁이 등 이토록 다양한 산나물 무치는 레시피(영광 안영례 아짐의 ‘봄나물’)가 담긴 책은 흔치 않을 것이다. 쑥버무리의 간을 맞출 때 “소금은 약간 넉넉하게 뿌리고 설탕은 ‘거짓말매니로’ 조금 끼얹으라”는 나주 도래마을 양동임 아짐의 계량법 역시 여느 요리책의 그것과는 다르다.

〈풍년 식탐〉은 〈전라도닷컴〉 황 편집장이 벌여오던 지역문화 기록·보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 ‘전라도 그림전’ ‘촌스럽네 사진전’ 등 지역의 언어와 풍경을 재발견하는 행사들을 여럿 꾸려온 황 편집장은 특히 ‘아짐’들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녀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 자식 입에 먹을 걸 넣어주기 위해 음식 재료를 구하고 다듬고 조리해 상을 차리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야말로 곧 한국 문화의 정수를 보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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