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애써 키운 인권헌장이..'돌연사'

김은지 기자 입력 2014. 12. 12. 09:02 수정 2014. 12. 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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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토 달기 힘든 말이다. 차별 금지는 보편의 의무이자 권리다. 차별 금지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한다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출산, 가족 형태·상황, 인종, 피부색, 양심과 사상,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 등이 여기에 속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그대로 담은 서울시민 인권헌장(인권헌장)은 좌초되었다. 20가지 차별 금지 사유 가운데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이라는 문구를 문제 삼아 보수 개신교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1월20일 열리려던 공청회에 떼로 몰려온 이들은 인권헌장이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것이라며 '동성애가 합법화된 서구에서는 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근친상간이 일어난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11월28일 열린 6차 시민위원회에서 인권헌장 50개 조항 중 돌봄 노동권 등 45개 조항은 이견 없이 합의되었다. 성 소수자 차별 금지 등이 담긴 다섯 개 조항에 시비가 붙자 시민위원들은 제정 여부를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그 결과 60대17(찬성 대 반대)이었다. 인권헌장 제정위원회는 표결에 따라 원안 그대로 통과되었다고 선포했지만 서울시는 공포를 거부했다. 표결이 아닌 만장일치 합의를 이뤄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보수 개신교인들과 만나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라며 인권헌장 관련 논란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을 보였다. 게다가 인권헌장 제정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은 '박 시장이 6차 회의 전날 안경환 위원장, 문경란 부위원장과의 면담에서 '(나를) 곤경에 빠뜨리기로 작정했느냐'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뭐하러 만드느냐'는 말을 했다'라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문경란 부위원장은 '내가 뭐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밝혔고, 자리에 배석한 서울시 관계자 또한 '드릴 수 있는 말이 없다'라고만 대답했다.

'인권이 언제부터 합의의 대상이었나'

애초에 인권헌장은 박원순 시장의 공약으로 시작되었다. 시민 참여가 기본 모델이었다. 150명 시민위원을 뽑는 자리에 1570명이 지원했다. 성별·사는 지역별·연령별로 그룹을 나눠 무작위 추첨을 했다. 전문위원 30명은 주로 회의 기록과 같은 보조 역할을 했고, 회의 주도와 발언은 시민위원들 몫이었다. 8월에 열린 1·2차 회의를 거쳐 제각각 '인권'이라 여기는 이슈 515개를 뽑았다. 여기에는 흡연권·주차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전문위원은 '그 과정에서 시민위원들이 인권 개념이 헷갈린다면서 먼저 교육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후 사익(私益)과 인권을 구분하면서 자체 토론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지금의 50개 조항이 추려졌다'라고 말했다.

김형완 전문위원은 지난 4개월간 시민위원회가 진행되어온 과정 자체가 인권 교육이자 감동적인 인권 현장이었다고 표현했다. '회의에서 성 소수자 혐오 발언이 나오자, 그 자리에서 커밍아웃을 하며 성 소수자가 특별히 다르거나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몸소 보인 시민위원도 있었다. 덕분에 편견을 가진 시민위원들이 마음을 돌리기도 했다. 이런 인권헌장을 어떻게 '합의'라는 핑계로 내팽개칠 수 있나.' 이름을 밝히길 꺼려한 한 시민위원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나, 민주당의 차별금지법 제정 철회 때도 성 소수자 부분이 논란이 되었다. 충분히 예상된 반발이었는데도 이제 와서 왜 합의 아니면 못 받아들인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인권 역사상 인권이 언제부터 합의로 이뤄졌는지 모르겠다'라고 비판했다.

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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