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과로죽음, 남들은 '왜 그걸 몰랐냐' 묻는다

2019. 12. 1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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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과로 죽음’ 유가족 4인의 고통 기록… 충격-분노-비난-원망-고독-공허, 유가족이 겪는 ‘이중고통’의 여섯 단계

2017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배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철폐, 과로사·자살 방지 대책위원회 출범 선포식. 한겨레 박종식 기자

한 해 400명 넘는 노동자가 긴 시간 일하다 숨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하지만 과로사나 과로자살 통계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과로사와 과로자살로 추정되는 뇌·심혈관계 질환이나 정신 질환으로 숨진 노동자 수로 그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고용노동통계를 보면 2017년에만 뇌·심혈관 질환으로 노동자 354명이 일하다 갑자기 숨졌고, 44명이 업무상 사유로 생긴 정신 질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과로사와 과로자살을 고려하면 실제 건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지 왜 목숨을 버리냐”고 어떤 이는 유가족에게 말한다. 하지만 남은 가족이 답할 수 없는 아픈 질문일 뿐이다.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족은 없다. 과로사와 과로자살은 노동자가 과로로 갑자기 숨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서 사고사, 병사, 자살 등과도 달랐다. 주로 일터에서 당한 신체 장애 수준을 판단하는 산업재해 등과도 차이가 있었다. 애도할 시간마저 빼앗긴 유가족은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또다시 고통스러운 기억을 헤집고 길어올렸다.

이 때문에 유가족이 ‘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겪은 충격, 죄책감, 원망, 배신감, 분노, 막막함, 공허감 등 정서적인 경험은 다른 유가족과 또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유가족 자신도 이해하기 힘들어 감추고 억누른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한겨레21>은 7월30일부터 11월11일까지 과로사 또는 과로자살로 가족을 잃은 4명을 만나 이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의 인터뷰를 정리해보니 여섯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순서가 조금씩 바뀌더라도 유가족이 비슷하게 겪은 정서적 경험이었다. 이 주제에 맞춰 기사를 다시 구성했다.

유가족의 요청으로 모두 가명으로 적었다. 지면에 실린 그림 3장은 이들이 과로사 또는 과로자살로 가족을 떠나보낸 뒤 자신의 모습을 그려 <한겨레21>에 보낸 것이다.

“제 마음이 아직도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편한가봐요. 앞날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아무런 진전도 없고 현재 상황도 답답해 물에 갇힌 느낌이에요. 윗부분에 제 바람을 그려보려 했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네요.” -김윤아씨 그림. 김윤아 제공

① 예고 없는 죽음, 충격과 상실감

예고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주는 충격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2017년 8월 저녁 8시쯤. 이영미(당시 51살)씨는 아들과 저녁을 먹고 나란히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영미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남편(당시 57살)과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원이 건 전화였다. 남편은 2015년 5월부터 대기업에 식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 관리자로 일했다. 직원은 “회사로 와보셔야겠다”고 했다. 남편은 같은 해 5월 부정맥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영미씨는 ‘이제 일을 그만두게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회사 연락 받고 달려가니 “이미 영안실”

“(남편이) 영안실에 있다”는 간호사의 말에 영미씨는 어쩔 줄 몰랐다. 영안실 앞에 있던 회사 사장은 영미씨를 보자마자 “죄송하다”며 무릎을 꿇었다. 2015년 영미씨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부산으로 무박 2일 동안 여행 가서 찍은 가족사진은 남편의 영정 사진이 됐다. 아는 사람은 영미씨에게 “남편이 지병을 앓았으니까 죽음을 예상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남편의 죽음은 예고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영미씨는 한동안 멍했다.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던 남편은 주말이나 돼야 저녁 7시쯤 집에 왔다. 지금도 주말이면 영미씨는 가끔 생각한다. ‘왜 이 양반이 안 오지.’

남편은 약속 시간을 곧잘 지켰다. 2018년 9월 김윤아(당시 34살)씨에게 “9시쯤 집에 가겠다”고 한 남편(당시 38살)은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남편은 이날 낮에도 회사 전화로 “9시쯤 가겠다”고 했다. 불안했다. 하필 남편 휴대전화도 고장 났다. 윤아씨는 밤 10시쯤 112에, 다음날 새벽 1시쯤 119에 신고한 뒤 회사 경비실에도 전화했다. 윤아씨의 불안은 불행하게도 들어맞았다. 새벽 3시께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윤아씨는 친구 차를 얻어 타고 남편 회사로 갔다. 회사 건물 1층 화장실에서 남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남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인 같은 해 8월 중순께 대기업 사무직이던 남편은 주말에도 일하려고 서류 더미를 갖고 왔다. 남편이 식탁에 던진 서류들을 본 윤아씨가 “이게 뭐냐”고 묻자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8월15일 공휴일이었지만 남편은 “할 일이 많다”며 회사에 나갔다. 8월 말께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왔다. 윤아씨는 날이 더워 남편이 일찍 왔다고 생각했다. 부서 실적이 크게 적자를 낸 때였다. 남편은 “징계위원회가 열리면 끝장날 거다”라며 불안해했다.

2015년 4월 오후 1시께 버스 안은 나른했다. 아르바이트를 나가던 박현지(당시 45살)씨는 잠깐 졸았다. 꿈에 남편이 나왔지만 전화가 와 잠에서 깼다. 모르는 번호였다. 노인은 “왜 산속에 차를 댔냐”고 물었다. 현지씨는 ‘경치 좋은 곳에 누워 남편이 햇볕이나 쬐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노인의 비명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전남 순천에서 서울로 발령받아 4월6일 올라간 남편은 사흘 뒤 야산에 주차된 자신의 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유서는 없었다. 대신 차 조수석에는 볼펜과 빈 종이만 놓여 있었다. 현지씨는 의식이 아득해졌다. 고함을 내지르던 자신의 모습만 흐릿하게 기억날 뿐이다.

남편은 인사이동이 잦았다. 자신을 ‘장기판의 졸’이라고 했다. 순천에 숙소가 없어 사무실에서 3개월 정도 먹고 잤다. 퇴근이 없는 하루하루였다. 그나마 4월이 되면 한가해질 거라는 기대가 컸다. 그때는 순천에 숙소를 구해 편하게 자고 휴일이면 집에 자주 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로 발령이 나자 남편은 욕을 퍼부었다. 순천 숙소도 아직 못 구했는데 난데없이 서울 숙소를 구해야 했다. 순천을 오가며 싼 보따리 15개를 차에 그대로 싣고 서울로 떠난 남편은 사흘 뒤 숨진 채 발견됐다.

회사 일로 “죽고 싶다”던 남편 남편(당시 39살)은 평소 아침 6시 30분에 통근 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하지만 2017년 6월, 이날은 웬일인지 새벽 3시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태어난 지 70여 일 된 딸과 자던 황정희(당시 35살)씨는 잠에서 깼다. 정희씨는 남편이 ‘어디 바닷가라도 가서 기분 전환하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잠들었다. 대기업 사무직 노동자인 남편은 2015년 8월 지금 일하는 부서로 인사이동했지만 과도한 업무 등에 시달렸다. 3∼4개월 전부터 남편은 입맛을 잃어갔다. 밥 먹는 횟수가 줄었다. 머리와 어깨가 자주 아프고 두통이 심해져 병원에 다니는 횟수도 잦아졌다.

말수가 적은 남편은 같은 해 3월 “상사가 나한테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모르겠다”며 회사 얘기를 오랜만에 꺼냈다. 2016년 회사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회사 관계자는 “2017년에는 일이 많아지니까 가족이 이해해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정희씨는 그저 남편이 일이 한꺼번에 몰려 힘들다고 생각했다. 5월 어느 날 남편은 “상사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회사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떨까”라며 정희씨에게 퇴사 얘기를 꺼냈다.

남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이틀 전 갑자기 회사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저녁쯤 기분을 묻자 남편은 “죽고 싶다”고 했다. 하루 쉬었다가 다음날 출근한 남편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날 점심때 남편이 상사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 내용은 이랬다. “여기까지가 최선인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은 힘듭니다.” 그다음 날 새벽 1시30분쯤 남편은 스스로 몸을 던져 숨진 채 발견됐다.

② 애도할 시간 없이 분노, 억울함

과로의 끝은 죽음이었다. ‘가슴 통증 이유.’ 남편이 쓰러지기 전 회사 건물 옥상에서 휴대전화로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마지막으로 검색한 단어였다. 조문 온 회사 동료들은 남편을 칭찬했다. 일하느라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남편은 동료들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영미씨는 가슴이 무너졌다. 가족이 다시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남편은 토요일에도 출근했다. 결혼식에 초대받아도 일 때문에 딸에게 대신 축의금 전달을 부탁했다. 평일에는 밤 11시에 퇴근해 뒤늦게 저녁을 먹었다. “배도 안 고팠냐”며 영미씨는 남편을 타박하곤 했다.

남편이 숨지기 2주 전 차를 새로 샀지만 차를 받으러 갈 시간도 없어 대리점에서 밤 9시가 넘어 차를 받아 왔다. 밤 10시에 두 사람은 새 차를 시승했다. 하숙생처럼 집에서 먹고 자던 남편이 어느 날 밤 9시쯤 집에 왔다. 알고 보니 손을 다쳐 병원에서 상처를 꿰맨 뒤 일찍 집에 온 것이었다. 아내가 알면 걱정할까봐 눈치만 보던 남편이었다. 남편이 숨진 뒤 영미씨는 사망 직전 일주일 동안의 노동시간을 하이패스에 기록된 시간으로 거칠게 계산했다. 약 70시간이었다. 당시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주 최대 노동시간 68시간도 넘긴 시간이었다.

회사는 ‘과로 죽음’ 인정하지 않아 회사는 과로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남편의 죽음을 회사 책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남편 개인 문제로 돌렸다. 남편의 상사는 윤아씨에게 말했다. “회사 생활이 다 비슷한데 남편이 약간 특이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동료들도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데 참고 일하는걸요.” 윤아씨는 억울했다. “남편이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말해준 동료들은 침묵했다. 윤아씨는 남편 죽음이 회사 책임이라는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장례를 치른 뒤 회사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윤아씨는 남편 휴대전화에 저장된 상사들에게 마구잡이로 전화를 걸었다. 사과는 기대도 안 했다. 적어도 회사 책임은 인정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사들 반응은 사늘했다. “회사 생활 하다보면 흔한 일이에요.” “(남편이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어요.” “인사과에나 알아보세요.” 하지만 인사과에 악을 쓰고 전화해도 윤아씨에게 사과는커녕 회사 책임을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를 감싸 안은 우리 가족 모습이에요. 저와 동생, 엄마도 아빠를 인정해주고 아빠도 우리를 인정해주고 수고했다며 서로를 위로해주는 모습이죠. 돌아가신 아버지는 까만색으로 그렸어요.” -이영미씨 딸 그림. 이영미 제공

③ 자신에 대한 비난과 두려움

남편의 첫 기일이었다. 영미씨는 목사님을 모시고 남편을 위해 기도했다. 남편이 숨진 뒤 어딜 가도 영미씨 혼자였다. 시장에 가도 혼자였다. 죽은 남편을 꿈에서 본 날도 있었다. 남편은 밝게 웃고 있었다. 영미씨는 속으로 ‘(혼자 가니까) 좋냐’라고 말했다. 남편이 떠난 뒤 영미씨는 한동안 밖에서 밥을 사 먹지 못했다. ‘저 집은 남편이 없네’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영미씨는 절로 의기소침해졌다. 남편의 빈자리가 의식됐다. 첫 기일이 오기 한 달 전부터 몸과 마음이 힘들고 우울했다. 생전 남편 모습이 날마다 떠올랐다.

어느 날 딸과 함께 아파트 승강기에서 내리는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모녀 뒤에서 혀를 찼다. 혀를 차는 소리는 승강기 문이 닫힐 때까지 들렸다. 영미씨를 바라보던 동정의 눈빛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또 다른 날에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떤 남자가 영미씨에게 ‘그 소식이 사실이냐’며 정색하고 물었다. 영미씨는 “왜 남 이야기에 난리냐”고 화를 냈지만 자신이 한없이 불쌍해졌다.

“과로자살은 나약함 탓” 유가족 이중 고통 과로자살을 나약한 개인의 잘못된 선택으로 돌리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유가족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현지씨는 누군가 남편이 과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까봐 부끄러웠다. 남편의 극단적인 선택이 사회에서 도태된 나약한 사람이 하는 선택일 거 같았다. 남편도, 자신도 부끄러웠다. 누군가가 현지씨를 동정하는 것도 꺼렸다. 애써 의연한 척 사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동정해버리면 자신의 의연함이 더 안쓰러워질 것 같았다.

아빠가 사고로 숨진 줄 알던 남매는 현지씨에게 아빠의 죽음을 자세히 묻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씨를 상담하던 보건복지부 중앙심리부검센터 관계자는 자녀에게 아빠의 죽음을 빨리 알릴수록 좋다고 권했다. 현지씨도 남매가 뒤늦게 다른 사람을 통해 아빠의 죽음을 알게 될까봐 두려웠다. 현지씨는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해가 바뀌기 전인 12월, 평범한 날, 평범한 시간에 남매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건 스스로 선택한 거야.”

둘째 아들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첫째 딸은 “뭔가 이상한데 차마 입 밖으로 말하기 두려웠다”고 했다. 딸은 “아버지 죽음이 나 때문일까봐 자책했다”고 했다. 남편이 서울로 가기 전 딸은 “아빠 자주 못 봐? 빨리 내려와”라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남편이 차를 끌고 가 딸이 버스로 등하교하던 때였다. 딸은 ‘혹시 아빠가 빨리 내려오다가 사고가 났나’라고 짐작했다. 딸은 “느낌이 좋지 않지만 차마 뚜껑을 열기에는 두려웠다”고 했다. 현지씨 품에 안긴 두 남매는 그제야 몸을 떨며 울었다.

④ 죄책감과 원망, 배신감

윤아씨는 남편과 성향이 잘 맞아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극단적인 선택 이후 윤아씨는 ‘그동안 자신이 헛살았다’고 자책했다. 바로 옆에 있는 남편 속도 몰랐다. 윤아씨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현재 상황도, 자신도 한심스러웠다. ‘내가 너무 둔했나’ ‘어떻게 그것도 몰랐을까’ 모든 게 자신 탓만 같았다. 과로사와 과로자살이 유가족에게 주는 충격은 비슷했다. 다만 과로자살이 주는 배신감은 상대적으로 더 컸다.

두 사람은 이르면 가을, 늦어도 겨울에 집을 살 계획이었다. 윤아씨는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믿었다. 같은 해 여름 두 사람은 이사할 동네 구경도 했다. 아이도 낳아 돌보며 평범하게 사는 미래를 꿈꾸며 윤아씨는 난임센터에 다니며 임신을 준비하던 때였다. 윤아씨는 아직도 극단적인 선택을 한 남편이 원망스럽다. 동시에 부족하고 모자라는 자신도 미웠다.

산재 신청으로 사회적 인정 받기 남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정희씨는 아는 수녀님과 하루에도 두세 시간씩 전화했다. 가만히 있으면 어디로 확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에너지 소모가 지나치게 많아서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낫다는 심정이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니까 몸이 버티지 못해 갑자기 뛰어내리고 싶어진 것이다. 몸은 젊지만 커다랗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걷다가 몸이 노화된 사람 같았다.

유가족을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생활비를 주로 번 남편이 갑자기 숨진 뒤 정희씨 역시 돈이 현실적인 문제가 됐다. 이 와중에 돈 걱정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지만 하루가 다르게 크는 딸에게는 지금 당장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 몸이 힘드니까 자신도 없어지고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남편이 그립다가도 원망스러웠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정희씨에게 “돈에 환장했다. 남편 잡아먹었다”고 했다. 과로자살 유가족이자 피해자인 정희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중적이었다.

⑤ 고독과 막막함

과로사, 과로자살의 원인을 입증할 자료를 가진 회사는 유가족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다. 산재 증명 책임은 유가족 몫이었다. 회사는 남편이 출퇴근 카드를 찍었지만 회사에서 일일이 출퇴근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폐회로티브이(CCTV)도 지워졌다. 영미씨 남편이 숨지기 2주 전에 산 새 차에 설치된 블랙박스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었다. 복원 작업을 했지만 불가능했다. 남편이 얼마나 긴 시간 일했는지 입증할 자료가 없었다. 때마침 남편 앞으로 하이패스 범칙금이 부과됐다.

회사가 남편에게 제공한 하이패스 카드였다. 영미씨는 하이패스에 기록된 출퇴근 시간과 거리 등을 거칠게 계산해 평균 노동시간을 산정했다. 영미씨는 매일매일 어떤 자료를 준비해야 할지 자나 깨나 가슴을 졸이며 고민했다.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의 지병으로 산재로 인정받지 못할까봐 걱정됐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남편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영미씨는 2018년 3월 산재를 신청했다. 산재 신청은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도전이었고,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사회적인 인정이었다.

남편의 죽음이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면 현지씨 역시 살아갈 힘이 없을 것 같았다. 현지씨 삶에 마지막 남은 끈이었다. 막상 산재를 신청하려고 자료를 모으다보니 현지씨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알기 시작했다. 남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회사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노무사를 만났지만 자료 수집은 막막했다. 회사에 컴퓨터 로그 기록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는 남편이 숨진 지 1년이 지나 기록을 지웠다고 했다. 남편의 휴대전화 카카오톡에 저장된 대화도 내용이 부실했다. 남편의 근무 기록도 불충분했다. 언제, 어디로 발령받은 기록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곱게 자란 남편이 정신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현지씨도 “무책임하게 가족을 남기고 떠난 남편”을 원망했다. 하지만 산재 신청을 준비해보니 ‘남편이 거대한 회사에서 무기력하게 일하면서 좌절감을 느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먹고살자고 일했는데 일 때문에 삶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걸. 현지씨는 2018년 10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 불승인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모녀가 살기 위해서도 산재 인정받아야 산재 신청을 하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정희씨와 딸이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남편의 죽음이 산재로 인정받아야 했다. 정희씨는 남편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회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며 직간접적으로 회사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내용을 모았다. 회사 메일에 접속해 남편의 업무가 지나치게 많았다는 걸 보여줄 자료를 수집했다. 여동생에게 부탁해 남편 회사 동료들의 진술서도 모았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과로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없다. ‘고의·자해 행위’로 발생한 자살을 기본적으로 산재로 보지 않는다. 다만 예외조항으로 ‘업무상의 사유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했다는 게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만 산재가 될 수 있다. 정희씨는 남편이 상사에게 “그것밖에 못 하느냐” “네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등의 모욕적인 말을 자주 들었고 그럴 때면 밥도 안 먹고 일했다는 동료의 구체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결국 회사 동료들의 이런 증언이 2019년 1월 산재로 인정받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표정은 없고 뭔가 정신없이 놀이터에서 나비랑 풍선을 쫓아다니면서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제 모습 같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무표정으로 무작정 앞을 향해 뛰어가고 있어요.” -황정희씨 그림. 황정희 제공

⑥ 공허, 일상으로 돌아가기

2018년 8월 드디어 남편의 죽음이 산재로 인정받았다. 영미씨는 눈물이 났다. 남편이 성실하게 일하다가 과로로 숨진 걸 인정받았다는 데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목표를 이루니까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영미씨는 며느리로, 딸로, 아내로, 엄마로 살던 자신을 내려두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따기로 했다. 올해 4월18일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차단기를 긁어 차에 흠이 났고 빨간 신호에 지나가 범칙금도 물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추가 연수를 받아 면허를 따자 길치였던 남편이 생각났다. 영미씨는 도로표지판을 보며 남편을 훈수하곤 했다. “당신 면허 딸 때 보자”던 남편은 이젠 없었다.

영미씨는 더 열심히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2019년 1월부터 딸과 각자 5만원씩 18개월 동안 돈을 모으기로 했다. 여행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영어 공부도 하고 있다. 먼저 간 남편을 떠올리며 영미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지 남은 삶에 대해 생각한다. 영미씨의 바람은 훗날 다음 생에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여보, 나 잘하고 왔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몰라도 영미씨는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으려 한다.

유가족이 두렵지 않은 세상을 남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지 4년이 지났다. 현지씨는 그저 남편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다. 원망도, 배신감도 모두 내려놓고 남편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남편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남편 곁에 현지씨도 앉아 있고 싶었다. 현지씨는 보건복지부에서 추진하는 자살 유가족 동료 활동 지원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비슷한 경험을 겪은 사람에게 동정이 아닌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서로가 위로받을 수 있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사회가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컸다.

남편은 다시 돌아올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을 사람들에게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현지씨도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비록 남편의 죽음이 산재로 인정받지 못해도 자신이 남편의 죽음을 ‘과로 죽음’으로 애도하고 사회에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하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부끄럽고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 유가족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유가족이 세상 밖으로 나와 ‘슬픈 일을 겪었어요’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세상이 되길 바랐다. 아직도 ‘사고로 남편이 숨졌다’고 둘러대는 현지씨 자신에게도.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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