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임시의정원' 탄생한 그날 밤 '대한민국' 국호도 정해졌다

조운찬 논설위원 2019. 4. 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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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100주년 맞아 국회헌정기념관에서 특별전

1921년 1월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원들이 함께한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백범 김구이고 둘째줄 왼쪽 세번째부터 차례로 신익희, 신규식,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손정도, 이동녕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상하이서 이동녕·조소앙·이회영 등 모여 ‘임시헌장’ 통과 공포 이틀 뒤 임정 수립…해방 뒤엔 제헌국회 구성에 노력

1919년 4월10일 밤 10시, 독립지사 29인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 김신부로의 셋집에 모였다. 연해주의 이동녕·조완구, 만주의 조소앙·이시영, 북경의 조성환·이회영, 일본의 이광수·최근우, 서울의 현순·손정도·최창식 등이 참석했다. 조소앙의 제안으로 모임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하고 의장과 부의장에 각각 이동녕과 손정도를 선출했다. 곧바로 첫 회의에 들어간 의정원은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회의를 이어가며 ‘대한민국 임시헌장’(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임시의정원이 밤샘 회의를 통해 제정한 ‘임시헌장’은 10조항으로 매우 짧다. 그러나 근대 헌법의 요소는 다 갖췄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의 원형을 담아냈다.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대한민국’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종종 등장했으나 국호로 확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국체를 민주공화제로 규정한 것은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임시헌장 제1조의 ‘민주공화제’는 당시 일본·중국에서도 볼 수 없던 선진적인 사상이다. 이후 헌법의 기초가 됐음은 물론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헌장 제1조와 같다.

4월11일 회의에서는 국무총리제를 수반으로 한 6개 행정부의 직제를 마련했다. 국무원의 수반인 초대 국무총리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13일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헌장이 공포된 지 이틀 뒤였다. 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임시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이다. 임시정부의 통치행위는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의 의결을 통해 이뤄진다는 얘기다. 이는 입법·행정 분리 원칙에 따른 법치주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임시헌장’에 ‘헌법’이란 이름은 없다. 그러나 내용은 현대 헌법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선진적이고 독창적이다. 100년 전 이미 여성 인권을 옹호하고 성별·계급·종교 등의 차별 철폐, 보통선거제와 같은 균등한 참정권을 명기한 점은 주목해야 한다. 특히 오늘날 헌법도 담지 못한 사형 폐지를 임시헌장에 포함시킨 것은 놀랍다. 이처럼 임시의정원이 민주공화제나 국민주권, 평등과 같은 가치를 임시헌장에 포함시킨 것은 의정원 의원들이 독립운동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임시의정원에서 1927년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약헌 개정 초안.

특히 임시헌장 기초자로 알려진 조소앙은 법학도로서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선진 법사상을 체득했다. 그는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당위성과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으며 독립운동 이념인 삼균주의를 체계화했다. 또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하며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 이론가로 활약했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3·1운동으로 고양된 민주주의 가치를 수렴해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산실이었다. 임시정부가 설립된 뒤에는 나란히 입법과 행정을 담당하며 해외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임시의정원은 입법기관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9월 임시헌장을 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전문 및 58개조)을 통과시켰다. 해방 직전까지 모두 5회에 걸쳐 헌법을 개정했다. 의정원은 또 1945년 8월까지 모두 39차례 의회를 열며 왕성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이 가운데 1925년 임정 대통령의 직무를 소홀히 한 이승만을 탄핵하고 1941년 임시정부 명의의 대일 선전포고문을 의결한 일은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다.

의정원의 활동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임시정부 요원과 마찬가지로 개인 자격으로 환국한 의정원 의원들은 해방 공간에서 과도정권 수립에 나섰다. 그러나 미군정의 방해와 간섭이 심해지자 1946년 1월 비상정치회의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듬해에는 다시 국민의회로 개명했다. 미군정이 ‘국회’ 수립을 막는 데 대한 고육지책이었다.

광복 3년째인 1948년 5월 대한민국 국회가 구성됐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0조는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다. 늦었지만, 임시헌장이 규정한 대로 의정원은 해방 후 대한민국 국회로 이어졌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시의정원은 조직과 역할·활동 등에서 지금의 국회와 다르지 않았다”며 “임시정부를 태동시켰을 뿐 아니라 제헌국회로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국회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운찬 논설위원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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