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시시각각] '강제징용'은 인권의 리트머스 시험지

남정호 2019. 1. 8.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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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 국가 대결 구도로만 봐선 안돼
협정대로 중재 가는 걸 겁낼 것도 없어
남정호 논설위원
한·일 간 현안 중 강제징용 판결 논란만큼 국내 여론이 갈린 적도 드물다. 많은 여론지도층, 특히 전·현직 외교관의 십중팔구는 대놓고 대법원 판결을 비난한다. “청구권 문제를 끝내기로 한 한일협정은 국가 간 약속인 만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거다. 그리곤 “법관들이 외교를 너무 모른다”다고 분개한다.

특이하게도 이번엔 볼멘소리에 거침이 없다. 친일 시비 탓에 여간해선 일본 정부 편드는 듯한 주장은 내놓고 못 하는 게 그간의 세태였다. 하지만 요즘엔 제 이름 걸고 판결이 잘못됐다는 글이 버젓하게 신문에 실린다. 이번 판결이 틀리다고 확신하기 때문일 터다.

일본은 어떨까. 나라 전체가 이번 판결을 욕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판결 직후인 지난해 11월 일본 변호사 90여명은 한국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그 후 20여일 만에 찬동하는 숫자가 200여명으로 두배 이상 늘었다. 지난 4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징용 피해자 지원 모임에는 미쓰비시에 대한 강제집행 전략을 짜기 위해 일본인 80여명이 몰려왔다.

이런 움직임은 무얼 뜻하나. 이번 논란만큼은 한·일 간 대결이라는 프레임으로 봐선 안 된다는 의미다. 양국 국민은 한·일 간 현안이라면 무조건 대결 구도로 보는 습성에 젖어왔다. 하지만 각계각층의 움직임을 뜯어보면 이번 논란은 독도나 위안부 문제와는 질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거칠게 말해 이번 논란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 주장을 얼마만큼 대신하고 제한할 수 있느냐를 두고 벌어진 이념 논쟁이다. 그런 차원에서 강제징용 문제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한·일 간 현안도 국경을 초월한 이념적 논쟁이 될 수 있는지, 이번을 통해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간엔 일본 최고재판소가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양국 율사들 이야기는 다르다. 강제징용 재판에서의 승소를 끌어낸 최봉태 변호사는 한국의 대법원과 일본의 최고재판소 모두 청구권에 대해서는 똑같은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일본 최고재판소 역시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소멸한 건 아니라고 해석해 왔다”며 “아베 총리는 사실을 오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변호사연합회도 2010년 12월 대한변협과 함께 공동성명을 낸 적이 있다. “한일협정 내 최종해결조항에 대해 양국 정부가 일관성 없이 해석하고 대응함으로써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방해했다”는 논리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최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이 올바른 만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가도 이길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그는 “한일협정에서 합의된 대로 중재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그래야 양국 모두가 받아들일 해법이 나온다는 주장이다.

현재 신일철주금, 미쓰비시 재판과 비슷한 소송은 14건이다. 1952년 1차 한일회담 때 조사한 강제노동 피해자 수는 23만여명에 달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비슷한 소송을 낼 수 있는 생존자는 수천, 수만 명에 이를 거다. 그러니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 짓는 게 현명하다.

설사 이 사건을 중재나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 결판이 난다고 해서 이를 한·일 간의 승패로 봐선 안 된다. 이는 역사 속에서 국가 간 약속과 개인의 기본권 중 어느 쪽이 더 중한지에 대한 하나의 판단인 까닭이다. 그러니 혹시 질지 모른다는 걱정에 중재를 망설이는 건 현명하지 않은 태도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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