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초봄인데..잿빛 하늘에 우울 넘어 '절망'

선명수·허진무·심윤지 기자 입력 2019. 3. 5. 16:42 수정 2019. 3. 5.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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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일상을 금지당한 시민들 “정부 대책 내놔야” 분통
ㆍ“애들은 자꾸 나가자는데…” 기관지·안구 환자들 급증
ㆍ피난 여행·이민 언급 늘어…정신질환 상관관계 연구도

마스크가 일상인지, 일상이 마스크인지… ‘미세먼지 안전지대’는 없었다.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닷새 연속 시행된 5일 서울 세종로 사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는 시민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버스 안 운전사와 승객들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제는 답답함을 넘어 절망감이 들어요.” 수도권에 닷새째 고농도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발령된 5일 아이 둘을 키우는 직장인 박모씨(36)는 출근해서도 아이들 걱정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둘째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친정에 맡겼지만,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째는 미세먼지를 이유로 결석하게 할 수 없었다. 박씨는 “주말만 되면 밖에 나가자고 조르는 아이들을 말리는 게 요새 일상”이라며 “육아정보 때문에 가끔 들어가는 맘카페에서 미세먼지를 피해 해외여행이나 단기체류를 한다는 글이 종종 올라오는데,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아이들에게 깨끗한 공기를 마시게 하는 것에도 빈부격차가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다.

고농도 미세먼지가 연일 기승을 부리면서 시민들의 불만과 걱정도 커지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미세먼지 우울증’을 언급하는 글이 올라오고, 코막힘·두통 등 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이들도 늘어난다.

국내에서 ‘미세먼지 청정지’로 여겨지던 제주도도 이날 사상 처음으로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가 내려졌다. 제주지역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던 한라산은 희뿌연 먼지로 사라졌다.

1급 발암물질인 초미세먼지(PM2.5)가 만연한 날 야외에서 일해야 하는 이들의 불안감은 더 크다. 가스검침원으로 일하는 공순옥씨(55)는 “미세먼지가 아주 심한 날에도 검침고지서가 있는 날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해야 하니 피할 길이 없다”며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냥 미세먼지를 먹으면서 일한다”고 말했다. 공씨는 “유일한 대비책은 회사에서 주는 일회용 황사마스크 정도인데 수량도 부족해 각자 모자란 건 사서 쓴다”며 “목이 칼칼하고 눈도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일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주차관리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모씨(65)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일 밖에서 일하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 모두 요새 기침을 심하게 한다”며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 임기응변으로 물이나 녹차를 자주 마시려고 노력하는데 기분이 좋진 않다”고 했다. 박씨는 “미세먼지도 일종의 재해인데 회사가 마스크라도 넉넉하게 지급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력악화·코막힘 등으로 병원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최근 들어 눈이 아프고 시력이 저하돼 안과를 찾은 직장인 ㄱ씨는 의사로부터 미세먼지로 인한 각막 손상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의사가 각막에 미세먼지가 끼어 있는 상태에서 눈을 깜빡이거나 비비면 손상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정부의 각종 대책에도 ‘잿빛 하늘’은 여전하고, 앞으로도 한반도에서 깨끗한 하늘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절망감을 더한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봄·가을을 중심으로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렸지만, 최근에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미세먼지가 이어져 지난겨울에는 ‘삼한사미’(3일은 춥고 4일은 미세먼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날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시민 다수가 ‘이민’도 언급했다.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가 2013~2017년 각종 블로그와 커뮤니티에 게시된 글 1억2700만건을 분석해 키워드 언급량을 추출한 결과, 미세먼지와 함께 ‘이민’을 언급한 글은 5년 새 10배 이상 늘었다. 미세먼지와 ‘우울증’이 언급된 글도 22배 증가했다.

정보기술(IT) 업체에서 일하는 영업사원 김모씨(27)는 “매일 외근 업무를 나가는데 공기가 이러니 일할 힘도 나지 않고 우울하다”며 “앞으로도 계속 이런다면 정말 이민을 가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인공강우를 하든 뭐라도 정부가 대책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회사원 서모씨(35)도 “작년까지만 해도 공기청정기에, 공기정화식물을 사들이면서 나름대로 대비를 한다고 했는데 요새 날씨를 보면 그런 게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라며 “주말에도 집 밖에 나갈 수 없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니 우울감과 무기력증만 커진다”고 했다.

최근 초미세먼지와 우울증, 조현병 등 정신질환이 일정한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서울대 보건대학원·건강환경연구소·분당서울대병원 공동연구팀이 2003년부터 10년간 정신질환에 의한 응급입원 8만634건을 대상으로 초미세먼지 노출과의 연관성을 분석한 결과, 초미세먼지 농도가 이틀 평균 10㎍/㎥ 높아지면 정신질환에 의한 응급입원이 0.8%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향은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철에 더 심했다.

‘미세먼지 피난’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주부 김모씨(62)는 부부동반 해외여행 일정을 앞당겼다. 김씨는 “4~5월쯤 여행을 가려 했는데, 미세먼지로 집 안에 갇혀지낼 바에야 좀 더 일찍 떠나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며 “잠깐 ‘도피’하는 것이지만 이번 봄 내내 이런 날씨가 이어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선명수·허진무·심윤지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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