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굴착기 기사 "물 뿌리던중 흙더미 주저앉더니 건물 무너져"

광주=권기범 기자 입력 2021. 6. 12. 03:00 수정 2021. 6. 1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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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광주 붕괴사고 관련 진술 확보
물먹은 흙 흘러내려 하중 못버틴듯
철거업체-시공사 직원 7명 입건
광주 재개발 철거 건물의 붕괴 참사를 수사 중인 경찰이 굴착기 기사로부터 “물 뿌리기 작업을 하던 중 굴착기가 올라가 있던 흙더미인 성토체(盛土體)가 꺼지듯 내려앉았고, 곧바로 건물이 무너졌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11일 알려졌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사건 당시 철거 작업을 했던 굴착기 기사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공사장의 비산 먼지를 줄이기 위해 평소보다 2배 많은 물을 뿌리다가 성토체가 약해졌는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다음 바로 건물이 무너졌다”고 진술했다.

철거업체들은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이 철거 작업을 빨리 끝내라고 요청했고, 물 뿌리기용 고압 펌프를 당초 3, 4대만 쓰기로 했는데 먼지가 덜 나게 하라며 두 배인 8대로 늘려 살수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철거업체가 작업 중 건물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흙더미인 ‘밥’을 부실하게 설치한 상태에서 살수 작업을 무리하게 해 물을 머금은 흙이 흘러내리면서 건물이 무너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이다. 이에 대해 현대산업개발 측은 “현장 직원들에게 확인한 결과 철거업체 측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경찰은 현대산업개발이 철거작업에 대해 하청을 준 한솔기업이 이른바 ‘철거왕’으로 불리던 이모 회장이 운영하는 다원그룹 측과 이면계약을 하고, 다원그룹 측이 철거 작업을 재하청 업체인 백솔건설에 구체적인 공법까지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경찰은 철거업체와 현대산업개발 직원 등 총 7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하고, 관련자 4명을 출국금지했다.

살수 펌프 평소의 2배 동원… 철거용 흙산 무너진뒤 건물 붕괴

“광주 건물, 물 뿌리던중 붕괴” 진술

9일 광주 동구 재개발구역 건물 철거에 투입된 굴착기 기사 A 씨가 흙더미 위에서 해체 작업을 할 때 참사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철거업체는 맨 위층인 5층부터 아래로 철거한다는 당초 계획을 지키지 않고 중간부터 해체 작업을 했다. 철거 도중 건물이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흙과 폐건축물 더미인 ‘밥’은 부실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체 작업 때 발생하는 먼지를 줄이기 위해 살수용 고압 펌프에서 물이 뿌려지고 있었다. A 씨의 굴착기가 있던 4층 높이의 거대한 흙더미인 성토체(盛土體)가 물에 젖었다. 물을 머금은 흙은 부실한 ‘밥’의 틈으로 흘러들어 건물을 넘어뜨리는 하중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 물 머금은 성토 내려앉으며 건물 압박

당시 철거 작업 전 사고 건물 뒤편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성토체는 건물 4층 높이까지 조성돼 있다. 하지만 작업 시작 후 찍은 사진에는 이 흙더미가 3층 높이까지 내려앉은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무게가 약 30t인 굴착기가 성토체 위로 올라가면 약간 가라앉을 수 있지만 이번처럼 수 m나 낮아지는 것은 보기 힘든 사례라고 지적한다.

안형준 건국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성토 작업은 물을 붓고 흙을 다진 뒤 다시 그 위에 흙을 쌓는 식으로 작업하는데 굴착기가 올라갔다고 성토가 이렇게 가라앉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사고 건물의 경우 통상 철거공사 중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세우는 ‘잭서포트’ 대신 흙 지지대인 ‘밥’을 건물 하단에 설치했다. 하지만 건물의 중심을 잡아주는 ‘밥’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다는 게 현장 근로자들의 증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수차가 많은 물을 뿌렸고, 물을 머금은 성토체가 내려앉으면서 건물을 압박해 결국 붕괴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 “시공사 지시로 물 2배 뿌려” vs “사실무근”

공사 단계마다 안전조치 부실이 누적돼 발생한 이번 사고의 원인을 두고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과 하청 철거업체인 한솔기업, 재하청을 받은 백솔건설은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

한솔기업 관계자는 “지자체 담당자와 살수 펌프를 최대 4대까지만 쓰기로 합의해 다른 건물을 철거할 때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 건물을 철거할 때는 현대산업개발 측이 먼지가 많이 날 수 있으니 물을 많이 뿌리라고 해 살수 펌프를 2배인 8대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철거 작업에 방해가 되어 펌프 2개를 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러자 현대산업개발 측이 다시 펌프를 모두 사용하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백솔건설 관계자도 “현대산업개발 측이 ‘먼지로 인한 민원 제기가 우려되니 건물을 하루 만에 모두 철거하라’고 했다”며 “철거를 서두르며 물을 평소보다 많이 뿌려 성토체가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현대산업개발 관계자는 “5층 건물을 하루 만에 부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두 회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백솔건설 측이 작업을 서두르라고 지시한 인물로 지목한 현대산업개발 직원은 “백솔건설은 이름도 모르는 회사”라며 “한솔기업과 회의할 때 ‘작업이 늦어져도 좋으니까 일단 안전하게 하는 방법을 찾자’고 했다”고 말했다.

철거가 하청, 재하청의 다단계 하도급으로 진행되면서 공사 단가가 하락해 졸속 공사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시공사인 현대산업개발은 학동 주택개발정비사업조합으로부터 공사비를 3.3m²당 약 28만 원에 계약했지만 하청사인 한솔기업은 10만 원, 재하청사인 백솔건설은 4만 원가량에 계약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한솔기업과 백솔건설 관계자 3명, 현대산업개발 직원 3명 등 7명을 입건해 사고 경위를 수사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전체 공정에 대한 총괄책임은 시공사에 있다”며 “공사 관계자들의 안전수칙 준수 여부를 종합적으로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광주=권기범 kaki@donga.com·이형주·김수현·이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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