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 극우운동' 경시 속..국가에 '총구' 겨눈 백인무장운동

정의길 2021. 1. 19.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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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의 세계만사]남북전쟁 패배 뒤 남부서 KKK 결성
베트남전 기점으로 '국가를 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에 반발하며 양적 확대
트럼프 당선 뒤 주류 넘보며 질적 도약

공권력, '개인적 비행' 판단 미온 대처
결국 전국에 계엄 방불 비상상황 불러
1992년 미국 아이다호 네이플스의 루비리지에서 연방 당국과 랜디 위버 가족 사이에서 대치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백인 무장 단체 구성원들이 위버 가족에게 무기를 전달하려다 연방 요원들에게 체포되고 있다. AP 연합뉴스
‘반국가주의화’ 미 백인무장운동

미국은 백인 무장 운동을 별종들의 주변부 운동으로만 취급했다. 조 바이든 차기 대통령의 취임식을 앞두고 계엄령을 방불케하는 워싱턴과 전국의 비상 경계 상황은, 그 대가다.

루비리지 대치 사건, 백인 무장운동의 새 기원

1992년 8월21일 미국 아이다호 네이플스의 벽촌 산간지대인 루비리지의 외딴 산채에 연방보안관 6명이 찾아왔다. 이 산채에는 극우 인종주의 테러단체인 ‘아리안 네이션스’와 결탁한 불법 무기거래 혐의로 기소된 뒤 도주한 랜디 위버(현재 73살)가 가족들과 은거하고 있었다. 보안관들이 접근하던 도중 총격전이 벌어졌다. 보안관 1명과 랜디의 14살 아들 새미가 숨졌다.

양쪽 사이에 대치전이 시작됐고, 미국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 대치 과정에서 랜디의 부인 비키 위버가 연방수사국(FBI) 저격수들에 의해 숨졌다. 미 전역에서 백인 무장단체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위버의 가족에게는 죄가 없고, 연방정부가 조용히 살려는 이들을 부당하게 탄압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대치는 극우 단체 인사들의 중재로 위버가 투항하면서 11일 만에 종식됐다.

탄압하는 연방정부와 이에 맞서는 백인 가정의 외로운 투쟁이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이 사건은 인종주의와 극우에 바탕한 미국 백인 무장 운동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루비리지 사건 때 대치 중에 포착된 랜드 위버의 부인 비키 위버. 그는 연방수사국(FBI) 저격수에 의해 숨졌다. 미국 연방보안관 제공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로 드러난 백인 무장 운동의 위험성

다음 해인 1993년 2월28일 텍사스 웨이코에 있는 ‘다윗지파’라는 유사 종교집단 구성원들이 압수수색하려던 수사당국과 총격전을 벌였다. 4월19일까지 무려 두 달 가까이 대치가 이어지던 끝에 연방수사국이 진압 작전을 벌이자, 이들은 불을 내고 자폭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76명이 숨졌다. 성착취 및 불법무기 소지 혐의를 받던 교주 데이비드 코리시는 물론이고, 어린이 25명과 임산부 2명이 포함됐다. 대량학살이 일어난 화재를 놓고 연방수사국의 소행이라는 음모론이 일었고, 백인 무장 세력들은 다시 궐기했다.

웨이코 대치가 끝난지 정확히 2년 뒤인 1995년 4월19일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연방청사는 물론이고 주변 324개 빌딩이 완파되거나 피해를 입으며, 모두 168명이 숨졌다. 부상자는 680명이 넘었다. 퇴역 군인 출신의 백인 극우 무장 운동 단체원인 티모시 맥베이와 테리 니콜스가 벌인 차량 폭탄 테러로 밝혀졌다. 이들은 사건 당일 도주하다가 체포됐다. 주범 맥베이는 루비릿지 및 웨이코 사건이 범행동기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웨이코 사건 당시 방화가 일어난 시간에 맞춰 폭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01년 9·11 테러 전까지, 미 역사상 최악의 테러로 기록됐다.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 테러가 부른 여론 악화와 당국의 대대적인 대처로 백인 무장 운동은 퇴조하는 듯 했다. 하지만, 수면 밑으로 내려갔을 뿐이었다. 26년 뒤인 지금 미국 수도 워싱턴은 백인 무장 운동 때문에 9·11 테러 직후를 연상케하는 사실상의 계엄령 상태다. 지난 6일 연방 의사당이 수천명의 폭도들에게 점령당한 사건은 루비릿지 사건으로 드러나, 오클라호마시티 테러로 절정에 올랐던 백인 무장 운동이 그 이후 16년 동안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9.11테러 전까지 미국 내에서 일어난 최악의 테러 사건인 1995년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차량폭탄테러 사건으로 부서진 연방청사. AP 연합뉴스

백인 무장운동, 인종주의에서 반국가주의로…베트남전이 계기

미국 백인 무장 운동에 대한 기념비적 저서인 <그 전쟁을 국내로 가져와라: 백인 세력 운동과 민병대 미국>의 저자인 캐슬린 벨루 시카고대 교수에 따르면, 의사당에 난입한 중추인 현재의 백인 무장 운동은 ‘큐 클럭스 클랜’(KKK)으로 상징되는 백인우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그 성격은 완전히 달라졌다. 종래의 백인우월주의는 미국과 그 정부를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인종주의를 주창했다. 반면에 현재의 백인 무장 운동은 미국이라는 국체를 부정하는 반국가주의적인 혁명주의다.

벨루 교수가 ‘백인 세력’(White Power) 운동으로 지칭하는 미국의 극우 인종주의적 백인 운동은 크게 베트남전을 기점으로 나뉜다. 베트남전까지는 KKK로 대표되는 백인우월주의 세력이 미국 사회 내에서 백인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운동이었다.

19세기 후반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남부에서 KKK가 결성된 것을 1단계로 볼 수 있다. 흑인 사회에 테러를 가하고, 공화당이 주도하던 대부흥 시대의 주 정부에 저항했다. 2단계는 제1차 세계대전 뒤 KKK가 다시 부활해, 남부뿐 아니라 미 전역의 비도시 지역에서 활동하며 백인의 인종적·종교적·민족주의적 권력을 폭력적으로 주장했다. KKK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뒤 3기로 접어들어, 민권 운동에 대한 폭력적 반대를 주도했다.

베트남 전쟁을 전후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이 미국을 휩쓸면서, 백인 무장 운동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대외적으로 ‘작은 황인종의 나라’ 베트남에 패배하고, 국내적으로 민권 운동에 밀려 백인의 지위가 상실되고 있었다. 미국의 이런 상황은 우파 성향의 백인들에게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 정부는 이제 백인들의 권익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타도해야 할 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전후 부흥과 복지 확대에 바탕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1960년대말 끝나면서, 불경기로 저학력 백인들의 경제사회적인 지위가 하락한 것도 배경이 됐다. 베트남전 와중인 1960년대 말부터 백인 무장 운동은 단순한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국가를 적으로 보는 4단계로 접어들었다. 1974년부터 백인우월주의 세력이 내전을 일으킨다는 공상소설 <터너 일기>가 연재되기 시작했는데, 백인 무장운동의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5단계로 들어간 백인 무장운동…국가를 상대로 전쟁 선포

1980년대 전반부부터는 5단계로 발전했다. 미 연방정부를 적으로 규정하고, 직접 타도를 꾀하는 백인 무장 단체들을 결성하고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1983년 다양한 백인 세력의 모임인 아리안스 ‘네이션스 세계 총회’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1984년 백인 테러단체 ‘디 오더’가 실제로 진보적인 유대인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를 암살하고는 미 연방정부에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들은 1980년대 전반 개발된 인터넷을 선진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1983년 만들어진 ‘리버티 넷’ 같은 컴퓨터 메시지 판은 백인 무장 운동 세력들이 교류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전쟁이 끝날 때마다 귀국한 퇴역 군인들이 백인 무장 운동을 한 단계 격상시킨 것처럼,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역할이 컸다. 베트남전 퇴역 군인들은 동네에서 흑인들에게 린치나 가하던 KKK식 운동에서 벗어나, 전쟁용 무기로 무장하고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민병대 조직 운동으로 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때부터 서로 소와 닭처럼 소원하거나 공통점이 없던 KKK, 신나치, 스킨헤드 등 극우 인종주의 백인 단체들이 반연방정부를 공통적인 이데올로기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전 퇴역 군인인 루이스 빔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역 뒤 루이지애나 KKK에서 활동하던 그는 1980년대 들어 ‘텍사스 비상 예비군’을 조직해 군사훈련 캠프를 차렸다. 청소년에게도 게릴라전 훈련을 시키는 등 극우 인종주의 백인 운동 단체를 무장화시키고 이론화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새로 생겨난 민병대 형식의 무장 단체들은 연방정부가 주민들의 총기와 재산을 압류할 것이라는 음모론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조세 저항 운동 및 시민 주권 운동도 영향을 줬고, 총기 소유 활동가들이 합류하면서 저변이 넓어졌다. 좌파의 착취수탈 담론도 차용해, 유대인이 주축이 된 글로벌 엘리트들이 미국 연방정부뿐 아니라 세계를 장악해 주민들을 착취한다는 ‘시오니스트 점령 정부’(ZOG), 혹은 ‘신세계 질서’ 음모론으로 커졌다.

백인 무장 운동은 지도부가 없이 개별적으로 산재된 방식으로 미국 전역에서 단체가 결성되며 퍼져나갔다. 이는 백인 무장 단체 운동을 ‘외로운 늑대’ 형으로 보이게 했다. 문제는 그 외로운 늑대들이 몇마리 정도가 아니라 무척 많은 수였다는 점이다.

‘남부 빈곤 법률 센터’(SPLC) 등 극단주의 세력 감시단체들의 평가를 보면, 백인 무장 운동이 5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한 1980년대 전반부에 그 핵심 구성원들은 약 2만5천명 수준이었다. 또 15만~17만5천명 정도의 적극적 동조자들, 그리고 약 45만명의 소극적 지지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1990년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테러로 그 위험성을 드러낸 백인 무장 운동은 약 500만명의 구성원과 동조자를 규합한 것으로 평가됐다. 물론 KKK 한 단체가 1924년 회원 400만명으로 절정에 오른 것을 감안하면, 전체 백인 무장 운동을 규합한 500만명이라는 수는 역사적으로 보면 놀랄 만큼 많은 수는 아니다.

1980년대초 백인 무장운동을 민병대 형태로 조직하는데 큰 역할을 한 베트남전 퇴역 군인 루이스 빔(왼쪽에서 세번째). 1981년 2월14일 텍사스에서 베트남 이민자 어부들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기 전에 자신의 민병대 조직들을 점검하고 있다. AP 자료사진

오바마와 트럼프 때 질적·양적으로 성장한 백인 무장운동

당국의 강력한 대처로 백인 무장 운동은 곧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사회 주류와는 동떨어진 ‘주변부 운동’으로 다시 치부됐다. 이 시기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던 때다. 이미 ‘지도부 없는 저항’ 운동 방식으로 진화한 백인 무장 운동은 인터넷을 통해서 대중화와 네트워크화됐다.

2008년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수면 아래 있던 백인 무장 운동 세력의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오바마 당선이 확정된 2008년 11월5일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의 흑인 교회 방화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대통령직 초기 몇 달은 증오 범죄 및 인종주의 사건이 크게 증가했다. 남부 빈곤 법률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1999년 활동중이던 백인 증오 단체는 457개였는데, 오바마 임기가 끝난 2016년에는 917개로 늘었다. 대부분 오바마 임기 때 만들어졌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백인 무장 운동에 다시 기회의 창을 활짝 열어줬다. 2020년 백인 극우·인종주의 단체들의 각종 행사는 3566건으로 2019년 2704건에 비해 30% 가량 증가했다. 트럼프 취임 첫 해인 2017년 이 수치는 500여건으로 시작해, 2019년까지 매년 2배로 증가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질적인 도약을 한다. 주변부 운동에서 주류로의 진입을 시도한 것이다. 백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음모론 뉴스사이트 <브레이브 바트>의 설립자 스티브 배넌이 백악관의 요직인 수석전략고문에 임명된 것에서 잘 드러난다. ‘대안 우익’으로 새롭게 포장된 백인 극우 이데올로기와 세력이 등장해, 기존의 사회 보수 세력들을 흡수했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딥스테이트(정부 내 깊숙히 자리잡은 그림자 통치 세력) 담론을 고리로 하여, 기존 정부와 질서를 부정하는 조류가 백인들 사이에서 광범위 하게 퍼져나갔다. 선거부정 주장은 그 연장선상이다. 이것이 결국 의사당 난입이라는, 선거결과를 부정하는 쿠데타적 사태로까지 진행된 것이다.

벨루 교수는 “집단폭력과 민병대 활동 물결은 미국에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이런 것들을 대담하게 만드는 고위 공직자들이고, 공직에 있는 그런 지지자들이 우리의 정치 지형의 일부라는 것”이라고 트럼프 시대의 백인 무장 운동의 도약을 지적했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당선된 날인 2008년 11월5일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의 흑인교회에 발생한 방화 사건. 이를 시작으로 오바마 재임 초기에 백인 극우인조주의 세력들의 폭력 행위가 크게 늘었다. 미 연방검찰청 제공

당국의 비호와 미온 대처가 큰 원인

백인 무장 운동이 만연하는 한 이유로는, 사법당국과 치안당국 등 공권력의 미온적 대처도 있다.

유대인 토크쇼 진행자를 살해했던 백인 테러단체 ‘디 오더’의 잔당 14명이 1988년 반란선동 혐의 등로 재판받았으나, 모두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다. 그 이후 연방수사국(FBI) 등은 백인 무장 운동 단체와 그 구성원들을 오직 개인적인 비행으로만 기소하는 대처를 해왔다.

경찰 등도 대부분의 백인 무장운동 구성원들을 모른 척 한다. 그들 대부분이 지역 자경단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경찰 등 치안당국으로부터 공식, 비공식적으로 치안을 위임받는 자경단은 백인 극우·인종주의 세력의 원천이다. 지난해 8월 위스콘신 커노샤에서 경찰의 인종주의 폭력에 항의하던 흑인 시위대를 총으로 사살한 백인 소년도 이웃 도시의 자경단원이었다.

백인 무장 운동에 대처해야 할 정보기관이나 경찰 자체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번 연방 의사당 난입 사태 때도 비번이던 경찰관들이 합세하고, 난입을 방조한 의사당 경찰관들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미국은 지금, 사회 안정은 물론이고 국체까지 위협하는 세력을 애써 모른 척 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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