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심청이인가..美백신 얻으려 "반도체 협력" 꺼낸 정부

유지혜 2021. 4. 2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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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코로나19 시대에 백신은 좀 과장하자면 핵무기에 버금가는 전략물자가 됐다. 마치 핵무기가 없는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 등 확장억제를 통해 안보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과 흡사한 상황이다.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화물터미널에서 관계자들이 정부가 화이자와 직접 계약한 백신 25만 회분(12만5천 명분)을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의 ‘백신 확장억제’를 확보하기 위해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최근 거론한 방법은 두 가지다. 우선 “꼭 필요할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표현이 있듯이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본다”(2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발언)는 ‘우정론’이다.
하지만 친하다고 핵무기를 빌려주는 나라는 없다. 백신도 마찬가지다.


정의용, 글로벌 공급망 협력 언급
정 장관의 두번째 복안은 반도체 협력이다. 21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미국산 백신 확보를 위한 반대급부를 묻는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이 관심 갖는 (반도체)글로벌 공급망에서도 미국을 도와줄 분야가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이 교란해온 반도체 공급망의 질서를 바로세우겠다며 공들이는 만큼 한국 기업의 반도체 협력을 지렛대 삼아 백신을 확보하자는 구상 자체는 설득력이 있다. 서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래의 공식’이 성립할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2일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CEO 서밋에서 웨이퍼를 들어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문제는 이런 구상을 정부가 공개적으로 들고 나오는 게 적절한지 여부다. 당장 기업들은 고위 당국자의 이런 입장 표명 자체를 일종의 가이드라인 제시나 압박처럼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간 미ㆍ중 간 전략 경쟁 구도에서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이란 기조 뒤에 숨어 한국 기업들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에서도 사실상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미국 정부가 화웨이 장비를 쓰는 LG 유플러스를 직접 거론하며 경고할 때 정부는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한다”고만 했다. 지난 12일 백악관이 반도체 CEO 서밋에 삼성전자를 호출했을 때도 ‘미국 정부 대 기업’의 문제라며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부가 나서 “투자하면 백신 확보 도움”
그래놓고 이제 와서 백신 수급 전쟁 최전선에 기업들을 내모는 듯한 접근은 무책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로 인해 기업들이 피해를 볼 경우에 대비한 정부 차원의 조치가 함께 마련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 패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지적을 의식한 듯 정 장관도 “(반도체는)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것이라 정부가 나서서 미 측과 협의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만 민간 기업의 협력 확대가 한국에 백신 관련 도움을 줘야 한다는 미국 내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대놓고 나설 수는 없으니 기업이 알아서 움직여주면 좋겠다는 취지로 들릴 수도 있는 발언이다.
심상렬 광운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백신 확보에 실패한 것은 정부인데,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업의 투자를 늘리는 게 도움이 될 것이란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부가 취해온 기업의 자율적 경영 존중이란 입장과도 모순된다”며 “외국에서 보면 국가가 기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식 시각이라고 충분히 오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초반 패 공개, 협상력에 도움 안돼”
설령 이런 구상을 갖고 있더라도 공개하는 순간 협상 구도는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또 반도체는 미ㆍ중 간 전략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맞붙는 분야라 정교한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보아오 포럼 개막식에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 연합뉴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20일 보아오 포럼에서 신기술 분야와 관련, 중국을 향해 “아시아 국가 간 협력 강화”를 강조했다. 반도체 분야에서 대통령과 외교장관이 이틀 간격으로 중국과도, 미국과도 협력하겠다는 뜻을 밝힌 모양새가 됐다.
외교통상부 2차관을 지낸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부가 발신하는 메시지나 전략적 신호음이 일관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다. 또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해야 할 사안과 공론화할 사안이 따로 있는데, 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초반에 패를 다 보여줘버리면 정부의 협상력도 떨어지고 중간에서 우리 기업들이 난감한 상황에 처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심청이가 아니다. 미ㆍ중 간 충돌로 거센 소용돌이가 이는 인당수에 빠지게 해선 안 된다. 심청이의 효심을 갸륵하게 여기고 구해준 동해 용왕은 현실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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