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을 팔아버릴까, 기업경영을 바꿀까"..ESG 투자자의 딜레마

이정훈 2021. 1. 2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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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부적합 기업 놓고 '투자회수' 혹은 '경영개입' 고심
블랙록·BNP파리바 등 석탄의존 기업에 '투자회수' 강수
美 최대 연기금 캘퍼스, 담배株 팔았다가 3兆 수익 놓쳐
학자들 "투자회수보단 경영개입 전략이 더 효과적" 주장
블랙록도 주총서 기업에 거부권 쓰기보단 주주제안 활용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주식을 계속 보유하면서) 경영에 직접 `개입(engagement)`해 기업을 변화시키는 전략을 쓸 것인가, 아니면 기준에 맞지 않는 기업 주식을 팔아 버리는 `투자 회수(divestment)` 전략을 쓸 것인가.

27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즈(FT)는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투자하는 전 세계 자산운용사들이 이 같은 딜레마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지난해 12월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뉴욕에서 ESG를 주제로 주최한 컨퍼런스에 600명 이상의 기관투자가들이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가장 큰 화두가 된 주제가 바로 그동안 금융회사들이 거의 고민하지 않았던 `투자 회수` 이슈였다고 전했다.

지난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총 매출 가운데 4분의1 이상이 석탄발전에 의존하는 기업은 액티브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BNP파리바자산운용도 총 매출의 10% 이상을 석탄발전에 의존하는 기업엔 투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 탄소배출량이 많은 전력회사에도 투자하지 않겠다고 했다.

문제는 이런 투자 회수는 큰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합법적이면서도 수익성이 좋은 회사를 이런 이유로 회피한다면 달콤한 수익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회사 소유권을 잃을 수도 있다. 이렇다 보니 ESG에 부합하지 않는 기업을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가지고 가면서 회사 경영에 적극 개입하는 전략을 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절충된 전략을 쓸 것인지는 BoA 컨퍼런스에서의 주요 주제였고 현재 금융사들에게도 큰 딜레마가 되고 있다.

총 3조2000억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스테이트스트릿 글로벌 어드바이저스는 내놓은 올 초 ESG 전망 보고서에서 “우리는 이 주제가 올해 내내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예견했다.

1970년 말로 돌아가 보면 투자자들은 사회적 목표 달성을 위해 투자 회수라는 적극적 전략을 써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행된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하는 쪽에서 주식 보유여부를 통해 기업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썼다. 학생들은 대학 기부금 운용자들에게 기피대상 기업들의 주식을 팔도록 종용했다.

그러다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불거지자 투자자들은 이런 전략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2014년에 1조달러 규모의 노르웨이 정부연금기금은 기후변화와 싸우기 위해 이 같은 투자 회수 전략을 연구해 석탄과 석유업체를 투자 리스트에서 자동적으로 배제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1조3600억달러 규모의 세계 최대 연금인 일본 후생연금기금(GPIF)은 그런 기업을 배제하기보다는 기후변화에 호의적인 기업들에 적극 투자토록 독려하는 전략을 썼다.

이후에도 연기금들은 이런 전략을 활용했다. 2016년에 영국 런던의 자치구인 월텀 포레스트가 전 세계 지방정부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연금에 화석연료 투자를 배제했다. 미국에서도 뉴욕주 연금기금이 탄소 배출을 줄이거나 재생에너지로 전환을 준비하려는 계획이 없는 에너지 기업 주식을 모두 처분키로 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인권단체들은 뱅가드와 블랙록, 피델리티 등 미국 주요 운용사들을 상대로 코어시빅이나 지오 등 사설 교도소나 이민자 수용시설 사업자 지분을 처분하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그 해 2398억달러 규모의 뉴욕시 연금기금이 대도시 중 처음으로 사설 교도소 운영업체 주식을 다 팔았다.

물론 이런 결정이 연기금의 운용 수익률을 떨어 뜨리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2000년에 미국 최대인 4440억달러 규모의 연기금인 캘리포니아 공무원퇴직연금(Calper‘s)은 담배회사들의 주식을 모두 처분했는데, 이로 인해 놓친 수익이 30억달러(원화 약 3조31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캐롤라인 르 모 ESG리서치 대표는 고객이었던 프랑스 자산운용사인 아문디 측에 “이 같은 투자 회수 전략은 투자자산의 위험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때에나 사용해야 하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조언한 바 있다.

지난해 트렌토와 하버드, 시카고대 교수 3명은 공동으로 작성한 논문에서 “개입에 비해 투자 회수 전략은 기업들이 사회적으로 책임있게 행동하도록 압박하는데 있어서 덜 효과적”이라고 지적하며 “투자 회수가 희망한 사회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어떠한 보장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투자한 기업들의 연례 주주총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반대표를 행사해 온 블랙록도 올해부터는 전략을 바꾸려 하고 있다. 블랙록은 “기업들이 수행하는 여러 사업들이 ESG에 부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급하게 행동해야할 필요가 있다”며 “개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주총 안건을 거부하는 것보다는 선제적으로 주주 제안을 내놓는 전략이 바람직한 만큼 우리도 스튜어드십 코드 차원에서 주주 제안을 더 중요하게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futures@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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